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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진 기억 돼가는 ‘공소’… 소중한 신앙생활의 요람 순례하자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0-09-23 조회수 : 3104

박해시기 전후에 형성된 유서 깊은 공소를 찾아서


박해 시기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사목했다. 신자들은 이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교리를 학습했으며, 선교 활동을 했다. 이러한 교우촌이 ‘공소’의 원형이다.
 

사전적 의미로 공소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지만,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해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작은 경당을 뜻한다. 라틴어 전례 용어로는 ‘오라토리움’(oratorium), ‘카펠레’(chapelle)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공소는 이것만으로 설명이 부족하다. 바로 선교의 거점이요 신앙생활의 요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신앙 선조들은 최양업 신부가 1859년에 작성한 편지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신앙이 없는 이도 공소가 소중한 곳임을 알고 사비를 털어 지어줬다”고 할 만큼 소중히 여겨왔다.
 

현재 전국의 공소는 700여 개에 달한다. 이중 적지 않은 곳이 관리할 여력이 없어 신자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거나 폐쇄됐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지난 1일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순교자 성월을 여는 미사를 주례하면서 공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젊은이들에게 공소 순례를 권했다. 전국의 공소 중 박해시기 전후에 형성된 곳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1. 수원교구 북여주본당 도전공소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원심리1길 5)
 

도전공소는 1957년에 설립됐으며 신자들이 약초를 팔아 비용을 마련하고 직접 나무를 베고 흙을 발라 지금의 공소를 지었다. 하지만 공소의 뿌리는 1801년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전에 따르면 전 토마스 일가가 한양에서 박해를 피해 원심동, 지금의 원주시 지정면에 정착했다고 한다. 계속된 탄압에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작은아들 안토니오만 데리고 ‘원심이’에 왔다고 한다. 원래 이름이 ‘원심이공소’인 것도 그 연유다. 세월이 흘러 안토니오는 다시 아들 셋을 뒀고, 둘째 아들 재영(아우구스티노)이 도전공소의 초대 회장이었다고 한다. 


2. 청주교구 이월본당 새울공소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점새울2길 35)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형성된 교우촌 중에서 배티성지 인근 교우촌 10여 곳은 현재 이름만 있다. 이 가운데 신자들이 오늘날까지 신앙의 물줄기를 이어가는 교우촌은 배티성지, 그리고 새울 교우촌 두 곳이다. 1850년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새울 교우촌에 살았던 김준기(안드레아)ㆍ조대여(판크라시오)ㆍ신 서방ㆍ김 서방ㆍ허 서방 등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청주에서 순교했다. 1890년대 초 공소로 설립된 새울공소는 1898년 수해로 훼손됐다가 1900년께 이곳에 살던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선조에 의해 살림집 겸 공소로 재건됐다. 당시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이곳을 방문해 견진성사를 주기도 했다.


3. 대전교구 예천동본당 금학공소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금학소길이길 158-20)
 

병인박해를 피하여 경기도 용인 지역에서 온 신자들이 거주하면서 교우촌을 형성했다. 1881년 두세 신부가 공소를 설립했다. 1917년 10월 본당사목구로 승격돼 서산 지역 첫 본당이 됐다. 1920년 본당이 상홍리로 이전된 후 다시 공소로 사용됐다. 지금의 공소는 옛 공소 터에서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것이다. 사제와 수도자를 다수 배출했다.

4. 전주교구 고산본당 되재공소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승치로 477)
 

되재공소가 있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는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교우들이 많았다. 성 이명서 베드로를 비롯한 순교자 110여 명을 배출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이 일대에 교우촌이 56곳이나 됐다. 되재본당이 설립된 후 성당 주변에 큰 교우촌이 형성돼 1890년대 후반에는 주일 미사 참여자 수가 400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대단했다. 한강 이남 지역 첫 번째 본당으로 최초의 한옥 성당을 봉헌했다.


5. 제주교구 신창본당 용수공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길 149-9)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려다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중 표착한 곳이다. 1949년 공소가 설립됐으며, 성당과 기념관 그리고 라파엘호 모형이 전시돼 있다.


6. 마산교구 지세포본당 예구공소 (경상남도 거제시 일운면 예구2길 14-7)

 

순교자 윤봉문 요셉의 가족이 1868년 정착해 복음 전파가 시작됐고 1895년 공소가 설립됐다. 거제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해진 곳이다. 윤봉문은 1888년 4월 1일 순교했다. 1886년 한불 수호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이 허용됐지만, 관리들은 윤봉문의 재산을 노리고 그를 처형했다. 바닷가 앞에 자리한 지금의 공소 건물은 2011년 12월 재건축돼 윤봉문의 형의 이름인 ‘윤형문 베드로 기념 성전’으로 축성했다. 4㎞ 거리에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7. 부산교구 언양본당 살티공소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11)

 

박해를 피해 숨어든 외지 신자들이 오며 언양 일대 곳곳에 교우촌이 형성됐다. 살티공소도 그중 하나로 1868년 설립됐다. 살티는 교우들이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살아남아서 ‘살 수 있는 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경주 관헌 포졸들이 교우촌에 들이닥치면 신자들은 성모상과 성물부터 땅에 묻고 산속으로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 주교를 비롯해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언양성당-길천공소-순정공소-살티공소-살티 순교성지를 잇는 13.1km 순례길도 조성돼 있다.


8. 안동교구 안계본당 쌍호공소 (경상북도 의성군 안사면 안사풍천길 1070-5)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서울에서 벼슬하던 박수광이 박해를 피해 쌍호리로 피난을 왔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쌍호리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시점을 220년 전으로 보고 있다. 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옹기를 구우며 살아 ‘점말(점촌)’이라고도 불린 쌍호공소는 1891년 공소로 설정됐고, 안동교구 안계본당 관할 공소로 있다. 권혁주 주교, 조종률 신부 등 성직자 14명, 수도자 13명을 배출한 성소의 요람이다.


9. 대구대교구 용성본당 구룡공소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구룡마을길 361-5)

 

구룡공소의 뿌리는 1815년 을해박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해를 피해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구룡산 아래 교우촌을 이뤘지만, 또다시 찾아온 박해로 구룡산 정상에 교우촌을 형성했다. 1883년 사목 보고서를 보면 이곳 신자는 60여 명, 4년 뒤에는 120명에 달했다. 교우촌은 박해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함없는 신앙으로 지역 복음화에 힘써 8명의 사제와 4명의 수녀를 배출했다.


10. 춘천교구 노암동본당 금광리공소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금평로 514)

 

금광리공소는 서울과 경기도, 경상도 등지에서 병인박해를 피해 피난 온 이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며 1887년 건립됐다. 영동지역에 복음이 최초로 전파된 곳이며 당시 신자 수는 100여 명으로 전해진다.


11. 원주교구 용소막본당 학산공소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310-2)

 

학산공소가 자리한 학산리는 성 남종삼 요한의 아버지 남상교가 관직에서 물러나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다. 남상교는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아들 남종삼이 찾아오면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다. 남종삼은 병인박해로 체포되기 전인 1866년 2월 1일부터 3주간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병인박해로 남종삼이 순교하고 부친은 공주로, 장자 명희는 전주로 유배돼 순교했다. 남종삼의 처 이조이, 막내아들 규희와 두 딸은 경상도로 유배돼 노비가 됐다. 그 후 이조이도 창녕에서 순교하여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기에 이른다.

순교자의 얼이 깃든 이곳은 1920년부터 신자들이 들어와 살면서 교우촌을 이뤘다. 현 공소는 1989년 신축해 남종삼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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