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故 장익 주교는 다양한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유창한 외국어로 교황에게 한국어를 알려주기도 했고요.
북한을 오가며 통일사목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교구장을 맡았던 춘천교구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습니다.
장익 주교의 삶의 발자취를 돌아보겠습니다.
[기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첫 방한을 앞두고 한국어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황에게 한국어를 알려준 건 로마에서 유학 중이던 장익 주교였습니다.
한국어의 원리부터 발음하는 방법까지, 한국어 수업은 40차례 넘게 이어졌습니다.
<故 장익 주교 / 2005. 4. 3>
"우리말을 배우시겠다고 해서 40여 차례를 가서 말하자면 우리말 공부를 시켜드렸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공부를 하셨어요. 그리고 한국에 오기에 앞서서 우리말로 미사를 당신 경당에서 17차례나 실제로 드리면서 연습을 하셨습니다."
교황은 한국어를 배우며 노동, 의료 환경, 청년 문제 등 국내 현안에 대한 질문도 쏟아냈습니다.
장익 주교가 국내 현안을 정리해 교황에게 보고한 자료만 2,000쪽이 넘을 정도입니다.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기 위해 한국어를 배운 교황의 모습은 장 주교에게 깊은 울림을 줬습니다.
<故 장익 주교 / 2005. 4. 3>
"소련 치하에서 말도 못하는 고통을 받던 시대에 자라신 분이기 때문에 내가 한국에 가서 어떻게 다른 나라 말을 하느냐...“
장익 주교의 발자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통일사목입니다.
인도적 대북지원에 대한 장 주교의 소신은 분명했습니다.
장 주교는 "우리가 잘 사니까 베푼다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故 장익 주교 / 2000. 6. 25>
"(북한 청년들의 말이) 황금만능주의에 젖어서 돈만 아는 수전노 같이 돼 버렸으니까 우리들도 통일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지만 그런 남한 사람들 밑에 가서 노예처럼 푸대접 받고 살고 싶진 않다고 하더랍니다."
장 주교는 침묵의 교회인 북한 복음화를 위해, 교황청과 북한의 관계 개선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1988년엔 교황청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장충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장익 주교는 1994년 춘천교구장이 된 뒤, 교구민들과의 일치에도 힘썼습니다.
항상 소탈한 모습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갔고.
<故 장익 주교 / 2010. 3. 20>
"사제서품 받고 첫 미사를 3월 마지막 날 드렸는데, 그 때 입던 제의가 이것입니다. 그대로 제가 입고 수십 년을 사순절 때마다 이 제의를 입고 살았고..."
재치 있는 농담도 자주 던졌습니다.
<故 장익 주교 / 2014. 2. 4>
"먹고 놀죠. 그러니까 독거노인, 그야말로 백수 독거노인 하고 있어요."
그리고 시간이 될 때마다 본당을 방문해 신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은퇴 후 서울에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엔 "춘천교구 신자들을 섬기라고 하느님이 춘천에 보내셨는데 어딜 가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서백주간을 도입한 장익 주교.
장 주교는 신자들에게 성경과의 일치를 강조했습니다.
<故 장익 주교 / 2017. 2. 11>
"우리가 성서백주간을 하고, 성경 봉사를 한다는 것이 그 말씀을 섬기는 일에 우리가 봉사를 하면서 우리가 그 말씀으로 인해서 스스로가 회심하고..."
장익 주교의 사목표어는 ‘하나되게 하소서’입니다.
사목표어대로 한평생 일치를 위해 헌신한 목자.
장익 주교는 2020년 8월 5일,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했던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
cpbc 맹현균 기자 maeng@cpbc.co.kr
출처 : 가톨릭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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