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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성 김대건 신부, 순교 직전에도 "전 행복합니다"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0-07-02 조회수 : 2659

[앵커] 한국 천주교회는 오는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1925년 성 김대건 신부가 복자품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인데요.

 

스물여섯 짧은 생이었지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영성은 신자들에게 깊이 각인돼 있죠.

 

시복 95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의 삶과 영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전은지 기자입니다.

 

[기자] 성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솔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재복(再福)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신심 깊은 집안에서 성장하며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고 우르술라 / 성 김대건 신부 어머니>
“천주께서 처음 세상을 내실 때 사람을 당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느니라. 그러니 우리는 내남없이 그분의 자녀이며 동등한 형제가 아니더냐. 이처럼 다 같은 형제끼리 높고 낮음을 가려 함부로 핍박해서야 되겠느냐.”

 

김대건 신부는 1836년 부활절, 첫 서양인 선교사인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방 신부는 열다섯 살이던 김대건 신부를 신학생으로 발탁했고, 김 신부는 고뇌와 기도를 통해 사제 성소를 받아들입니다.

 

<성 김대건 신부>
“마카오가 어디입니까. (여기서 수만 리 떨어진 외국일세)”


“천주님의 뜻이겠지요. 저같이 약한 사람이 그 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김대건 신부는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김 신부는 가슴앓이와 위장병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6년간 성실하게 공부했습니다.

 

그 사이 조선에서는 2차 천주교 박해인 기해박해가 시작됐습니다.

 

엥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참수를 당한 피의 박해.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도 기해박해로 순교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 개척에 힘을 쏟았습니다.

 

조선전도를 만든 것도 선교사들의 입국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진쟈샹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대는 나와 나의 후임자에게 존경과 순명을 서약합니까?”

 

“예, 서약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1845년 10월 12일 조선 입국에 성공했습니다.

 

김 신부는 서울과 경기 지역을 오가며 미사를 주례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김 신부는 선교사들의 서해 입국로를 개척하다 체포됐습니다.

 

옥중에서도 세례를 주었던 김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 처형장에서 순교합니다.

 

김 신부는 스물여섯 해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마지막까지 굳건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세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고난을 함께 가기 위해섭니다. 전 행복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이후 1984년 5월 6일 우리나라를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모든 게 하느님 섭리가 아닌 것이 없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의 순교 영성은 17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 신자들의 마음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CPBC 전은지입니다.


cpbc 전은지 기자 eunz@cpbc.co.kr

 

출처 : 가톨릭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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