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1월 말부터 한국사회는 전례 없는 비상 상황을 겪었다.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시작된 ‘물리적 거리 두기’는 학교와 보육, 돌봄을 비롯한 집단 모임 등 모든 집단 행동과 모이는 행위를 중단시켰고, 그중에는 종교모임도 포함됐다.
한국 천주교 역사가 시작된 지 236년 만에 처음, 직격탄을 맞은 대구대교구를 시작으로 모든 교구가 공동체 미사를 중단했고, 신자들은 방송과 영상으로 미사에 참여해야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든 활동도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이뤄졌다.
이같은 집단 전염 사태는 앞으로 반복될 것이며, 그 주기는 더욱 짧아질 것이라는 예측에서 앞으로의 새로운 일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을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는 상황이다. 21세기 ‘새로운 사태’, 이번 코로나19가 가톨릭교회에 던져 준 화두를 어떻게 풀어가며 앞으로의 행보를 위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사제, 수도자, 신학자들에게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찾고 살아야 할 신앙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강신모 신부(의정부교구 구리성당 주임), 김용태 신부(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조성옥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총원장), 조민아 교수(미국 조지타운대), 김남희 교수(가톨릭대)가 해 주었다. 이 답변들을 가상 좌담회와 인터뷰 형식을 빌어 싣는다.
1. 먼저 이번 코로나19 감염 사태에 대한 교회의 결정과 실행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강신모 신부 : 일선 본당 신부로서 교회 자체적으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처음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가톨릭교회가 제대로 응답한 것은 미사 중단뿐이라고 봐요. 미사 중단에 따른 사목적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 일찍 대응하지는 못했습니다.
미사 중단도 처음부터 무기한이었다면 장기적 대책을 마련했을 텐데, 1주, 2주씩 연기하면서 마냥 기다려야 했고, 대 사회적 지원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김용태 신부 : ‘제도교회’보다는 교회의 구성원인 신자들이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많은 사람을 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고 본다면, 그 교회들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정말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본질적 특성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차원에서 교회는 코로나19뿐 아니라 항상 가난한 이들의 친구이자 이웃이어야 합니다. 해고, 죽음, 난민 추방과 같은 재앙은 늘 우리 곁에 있으니까요.
조민아 교수 : 저는 감염증 확산을 막기 위해 교회가 솔선수범하여 각 교구 별로 잠정적 미사 중단을 결정한 일이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선을 위해 함께 사는 사회의 요구에 협조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건물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생명의 요구를 따랐기 때문이고, 보이지 않는 교회를 믿고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큰 결핍과 불안, 두려움을 감수하면서 차분하게 질서를 유지했고, 이것은 그저 요구에 따라 수동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신앙생활 공백을 메울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사이버 공간을 통해 서로 위로하고 기도하며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실을 만들어 서로를 잇고 있는 거죠.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고, 교회를 세상 속에서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성체. (이미지 출처 = Flickr) |
미사 중단과 “그동안 먹은 빵값을 치를 때”라는 성찰
언제나 신앙의 중심은 삶이며, 삶 떠난 신앙은 없다
“모이지 말라”는 사회적 요청은 복음에 대한 도전 아닌, 본질에의 길
2. 코로나19는 처음으로 본당의 미사와 모임을 멈춰 세웠습니다. 미사와 영성체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삶의 중심이 흔들린 일이었을 텐데요. 이를 계기로 우리가 성당 미사가 아닌 곳에서 신앙과 삶의 중심을 찾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절실해졌습니다. 이 상황이 위기나 걸림돌에서 멈추지 않도록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일까요?
조성옥 수녀 :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은 주일미사 참석과 고해성사입니다. 물론 신심단체 활동이나 봉사활동, 성경공부 등을 적극적으로 하는 분들도 많지만, 현재 교회 분위기에서 믿음의 표현은 그 이상 되기 어렵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미사와 고해성사의 중단은 신앙생활을 멈추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사목적 배려로 영상 미사를 할 수 있지만, 성체를 모실 수 없는 아쉬움은 아주 큽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이제 그동안 얻어먹은 빵 값을 치를 때가 되었다”고 쓴 글을 봤습니다. 코로나19로 익숙하고 당연했던 신앙의 표현들이 가로막히는 당황스런 날들이 지속되면서 정말 먹은 빵값을 치르는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고, 죄의 용서를 받으며 새롭게 축복받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축복받은 사람들로서 성당 문을 나가서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이웃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당 문이 닫히고 미사에 참례하지 못해도 멈출 수 없는 일입니다.
미사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만, 우리가 먹은 빵값을 치르는 부분에 약하지 않았을까, 오늘의 이 ‘성체 단식’은 먹기만 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아 소화불량에 걸린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처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용태 신부 : 언제나 신앙의 중심은 삶입니다. 인간의 삶을 떠난 신앙이란 있을 수 없고, 인간을 떠난 신은 신이 아닙니다.
공동체의식, 공동선, 연대 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은 저버리고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온 우리에게 코로나19의 강력한 전염성은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켜줍니다. 네가 건강해야 내가 건강하다는 것, 그동안 교회가 그토록 설파해 왔던 보편적 구원의 이치를 절절하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사태는 신앙의 위기가 아니라 쇄신의 기회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었는가, 공동체성과 공동선, 연대성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구원이라는 가치를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교회의 외침이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울려퍼지지 않고, 성당 울타리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는가. 미사 중단이 마치 신앙생활의 중단처럼 생각되는 현실 자체가 이미 우리 교회가 얼마나 신앙의 중심인 삶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었는지 반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조민아 교수 : 코로나19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참 각별한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대재앙과 재해가 찾아오면 교회는 언제나 큰 변화를 겪어 왔어요. 단기적으로는 흥했고, 장기적으로는 위기를 맞았죠.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들은 재난이 죄의 심판이라 여기고 교회로 몰려들었지만, 이내 종교가 재앙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교회의 권위를 의심하게 됐습니다.
14세기 흑사병 뒤의 인문주의, 1777년 리스본 대지진 뒤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등 대재앙이 불러온 새로운 문화와 사조에 적응하거나 저항하면서 그리스도교도 함께 변화했는데, 이는 위기보다는 사실 종교가 시대의 변화를 거쳐 성숙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또한 거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과거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요. 종교는 질병을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오히려 질병과 싸우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과 반대되는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사실, 코로나19의 혼란 속에서 사회가 교회에 요구한 것은 “모이지 말아 달라”는 것뿐이었어요. 종교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모이지 말라”는 요구는 언뜻 듣기에 교회에 대한 정면 도전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인 복음에 대한 도전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중요한 깨우침인 것 같아요.
성주간 동안 예수가 사라진 빈무덤을 묵상하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성베드로 광장에 홀로 서서 기도하는 모습이 마치 예수가 떠난 빈 무덤을 지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모습과 같아 보였죠. 외로움, 자괴감, 고통과 상실의 긴 밤을 보내고 이제 부활한 예수를 만나 놀라고 기뻐하는 마리아에게 예수가 건넨 말은 “붙잡지 말라”였어요.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돌아온 예수는, 우리가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진리로 남기를 원치 않았던 거죠.
수난 전, 예수님은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당신이 죽은 후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할 것인지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몸을 부수고 생명의 빵이 되어서 우리 삶 안에 함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몸이 우리를 떠났기에, 그는 이제 우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우리의 입을 통해 말을 하고, 우리의 팔과 다리를 통해 움직이게 되었어요.
“붙잡지 말라”는 예수의 청은 교회가 겉으로 보이는 붙잡을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본질로, 생명으로, 그가 숨쉬는 삶의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한다는 준엄한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감염증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어쩌면 가장 시기적절하게 우리에게 들려오는 부활 선포가 아닐까요. 예수는 성숙한 세계에 살아가기 위한 성숙한 신앙을 우리에게 주고 가신 거죠. 우리가 당신을 믿기 원했던 만큼, 예수는 우리를 믿었던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종이 특별강복에 앞서 전한 강론의 의미가 새롭습니다. 겉으로만 우리를 ‘구원’해 주는것처럼 보이는 습관들로 무마하려는 모든 시도와, 우리의 뿌리에 호소하고 앞서 간선조들을 기억하는 데 무능하게 했던 그 모든 요소를 드러냅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지니라고 호소하시고 꾸짖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위해서라기보다 당신께로 달려가 당신께 의탁하도록 해 주십시오!”
'나를 붙들지 마라', 알론소 카노. (이미지 출처 = 가톨릭 굿뉴스) |
‘성전’에 국한된 붙박이 사목이 아닌, 어디에서든 이뤄지는 사목으로
‘성전’은 부서지고 나눠지며, 삶과 함께 드러나는 몸,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교회
3. 같은 맥락에서 공간, ‘성전’의 의미도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용태 신부 :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절감하게 된 것은 전례 중심의 신앙생활이 갖는 한계성입니다. 성전중심주의는 전례중심주의와 통합니다. 물론 전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정점이며, 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정점이 있으면 그 정점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성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가 갖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다양성 안의 일치’이기도 합니다.
‘성전’이라는 장소 중심의 성대한 전례도 중요하지만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빛깔의 거룩한 삶도 전례의 연장선상에 있는 중요한 신앙행위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전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전례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미사를 할 수 없는 상황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저는 이 말씀을 깊이 성찰해 보고 싶습니다. 코로나19 사태는 기원후 70년경의 성전파괴를 연상케 합니다. 유대 신앙의 중심은 성전이었고 성전이 파괴됐다는 것은 모든 것의 끝이었지만, 성전이 무너지는 순간, 그 안에 갇혔던 하느님도 풀려난 것이죠.
본래 이스라엘의 성전은 이동식이었습니다. 하느님 현존 장소인 계약의 궤를 사람들이 어깨에 매고 다녔고, 밤에는 성막에 보관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사람들 삶의 현장 어느 곳에나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을 왕권 강화 목적으로 궁 옆에 고정시켜 놓은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며, 성전을 왕권강화의 도구, 사제와 원로들의 기득권 수호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그와 함께 신앙도 변질되게 만든 것이 바로 ‘성전중심주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 성전중심주의를 깨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권력이 만든 ‘붙박이 하느님’을 다시 ‘온 세상 모든 곳, 모든 이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아닌 거리에서 산등성이에서, 호숫가에서, 회당에서 가르치고 머물면서 삶의 현장 모든 곳이 하느님 구원이 선포되고 이뤄지는 성전일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성전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참신앙, 곧 인간 중심, 현장 중심, 삶 중심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특정 장소에 국한된 붙박이가 아니라 모든 곳에서 가능한 ‘이동식’ 사목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됩니다.
새로운 사목적 패러다임의 중심은 전례가 아닌 ‘말씀’이며, 그 형태는 현장에서 말씀 선포, 현장에서 함께 대화하고 나누고 연대하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전은 독점되지 않고 다양화되어야 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전이고 살아가는 곳곳이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조민아 교수 :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6,56)라고 선포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과 결합하고, 우리의 몸 또한 그의 몸과 결합하는 신비를 드러냈죠.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이루는 한몸이 바로 성전, 교회입니다. 건물은 성사의 신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지 신비 그 자체는 아니죠. 영성체를 통해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 믿음으로 깨닫는 몸, 믿음으로 살아가는 몸입니다.
파스카는 죽음이 새생명으로 변화하는 신비에요. 그러나 죽음이라는 단절이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죽음 이전의 몸과 죽음 이후의 몸은 다르죠. 예수가 성체성사 제정을 통해 가르쳐 준 죽음 이후의 몸은 부서지는 몸, 나누어지는 몸, 삶 속으로 들어와 삶과 함께 드러나는 몸입니다. 바로 이러한 교회가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스스로 벽을 허물고 세상으로 들어와 삶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소외되고 방황하는 작은 생명들을 보듬고 이어 주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교회도 부족하고 혼란스러우니 당신들의 팔과 다리와 눈과 입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 가르치고 훈육하고 벌 주는 교회가 아니라 폭력과 분노와 외면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교회, 그렇게 상처받은 세상을 위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 교회 말입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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