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1920년대까지는 신사 참배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데 이어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 문제가 커졌다. 이에 주일 교황사절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는 초대 중국 교황사절인 첼소 콘스탄티니 주교에게 요청,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 7월 반포한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회칙」(Ex quo singulari)과 관련해 조상 제사의 문화적 측면을 다시 한 번 논의해 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의 공자 의례 문제와 한ㆍ일 신사 참배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신사 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자 의례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ㆍ중ㆍ일 가톨릭교회에서 신사 참배가 허용되는 데 실마리가 되는 회의는 1935년 3월 12일 만주국 수도 신징(현 창춘)에서 만주국 주재 교황청 대표 오귀스테 가스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주국 주교단의 공자 의례에 관한 회의였다.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제사 중 위패(位牌)에 절하는 문제였는데, 만주국 주교들은 위패에 절하는 문제를 문화적 행위로 보고 허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교황청에 보고했다. 비오 11세 교황은 이에 따라 1935년 5월 28일 만주국 주교단의 결정을 인준하고, 공자 의례 예식에 일부 금지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 신자들의 참여를 허용했다. 이어 1936년 5월 26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훈령을 통해 제사와 함께 신사 참배를 전격 허용한다.
한ㆍ일 교회의 신사 참배 허용
만주국 주교단의 이 같은 결정은 한ㆍ일 주교단의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독일 출신으로 일본 히로시마대목구장으로 있던 요한네스 로스 주교도 1932년 ‘신사 참배에 관한 교회법적 허용 가능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데 교회법적 근거를 제시한 것도 영향을 줬다. 그는 1983년 개정 이전 구 교회법 1258항 ‘가톨릭 신자의 비가톨릭적 종교예식 참여에 관한 규정’에서 신사 참배 참여 허용 원리를 찾아냈고, 주일 교황사절 에드워드 무니 주교는 이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사 참배의 길을 열었다. 무니 주교는 이 논문을 한ㆍ일 주교단에 모두 보내고, 논문을 본 소감을 달아 회신하라고 요구한다. 이어 도쿄대교구장은 논문의 결론을 도출하고, 주일 교황사절은 신사 참배가 허용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제시한다. 이 논문을 접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는 1933년 10월 신사 참배 반대 입장을 바꿔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같이 신사 참배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할 정도로 신사 참배 허용에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도쿄 도심 메이지 진구(明治神宮)에 모여든 일본인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
한국 교회 내 갈등
당시 한국 교회는 신사 참배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26년에 펴낸 교리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를 통해 신사 참배를 금지했다. 또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공의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사목 지침서에서도 신사 참배는 금지됐다. 하지만 1932년에 내놓은 「천주교요리」 개정판에서는 입장이 확 달라져 신사 참배를 허용했다.
1932년만 해도 서울ㆍ대구ㆍ원산대목구와 평양ㆍ연길지목구 주교단 중 대구의 드망즈 주교를 빼고는 모두 신사 참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주교들도 입장을 바꾼다. 신사 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하던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이 1935년 갑작스레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해 한국의 모든 지역 교회는 신사 참배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다.
끝까지 반대하던 메리놀회 선교사 월터 콜만 신부와 레오 스위니 신부는 미국으로 소환됐다. 콜만 신부는 탄원서를 교황청 성무성성(현 신앙교리성)에 보냈지만, 초대 주일 교황사절을 지낸 포교성성 장관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이 이를 묵살했다.
1933년에 결정된 신사 참배 반대 번복을 교회가 곧바로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주교회의 안에서만 공유하다가 번복 사실을 공개한 것은 3년 뒤 「경향잡지」 1936년 4월 호를 통해서였다. 이어 한 달 뒤 포교성성 훈령이 발표되자 한국 주교회의는 신사 참배와 관련된 사목 지침서 조항을 개정, “신사 참배는 애국 행위의 표명”이라고 규정했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36년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 조사위원회’를 꾸려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 위원회 역시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사 참배 종언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쇼와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신사 참배는 사실상 종언을 알린다. 그해 12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국가 신도와 관련된 모든 교육과 지지, 홍보 등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처를 내린다”고 발표한다.
신사 참배가 공식 금지된 지 이제 75년이 지났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신사신도’가 ‘국가신도’가 되면서 비롯돼 군국주의 망령 속에서 횡행했던 신사 참배는 이제 공식적으로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
1995년 일본 주교회의 정의평화평의회가 “일본 교회가 신사 참배를 애국주의라는 미명하에 수용했고, 아시아와 태평양 주변 국가 신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아픔을 줬다”고 고백하며 공식적으로 신사 참배 허용이 잘못이었다고 인정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