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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묵주기도 성월 기획] 순교자들의 묵주기도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9-10-02 조회수 : 989

[묵주기도 성월 기획] 순교자들의 묵주기도

모진 박해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성모신심’

서학서나 한글 번역서 등으로 신자들 사이 퍼진 성모신심
선교사에 의해 더욱 활성화
「성모매괴경」과 「환희」 등 묵주기도서 박해 당시 발견돼

발행일2019-10-06 [제3164호, 4면]

상인이었던 권득인 베드로 성인은 성패와 성물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다 체포돼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탁희성 화백의 작품.

묵주기도 성월이 돌아왔다. 1883년 레오 13세 교황이 제정한 이 성월은 신앙인들이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신비를 더욱 깊이 묵상하도록 한다. 한국교회는 다른 지역교회에 못지않게 초기 교회 때부터 성모 공경을 해왔다. 신앙 선조들에게 묵주기도는 박해의 고초 속에서 어려울 때마다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을 청했던 각별한 신심 행위였다. 묵주기도 성월을 맞아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신심을 키웠던 교구 순교자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 묵주기도, 성모신심 일등공신

차기진(루카·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은 한국교회 박해기 성모신심의 첫 번째 특징을 ‘자발성’으로 꼽는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형성된 성모신심은 천주 교리 가르침 아래서 자발적으로 함양됐다는 것이다.

차 소장은 「박해기 한국천주교회 순교자들의 성모신심」에서 “중국서 전래된 서학서나 이를 한글로 번역한 서적 영향으로 성모 마리아의 속성과 호칭의 의미를 이해하고 찬미, 청원 기도를 암송하거나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밝히고 있다.

자발성은 보편적인 성모신심으로 이어졌고, 이후 1836년 초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그들의 지도와 모범으로 더욱 활성화되고 심화됐다.

이런 배경에서 묵주기도는 순교자들의 직접적인 성모 공경 방법이었다. 성모신심의 일등 공신으로서 박해시대에 어떤 성물보다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기도 방법도 단순해 어디서든 쉽게 바칠 수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 과정에서 형조에 압수 소각된 염주(念珠, 즉 묵주)는 묵주기도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함께 형조에 압수된 한글본 「성모매괴경」, 한문본 「성모매괴경」, 「환희」(歡喜) 등은 묵주기도나 성모 공경에 이용된 기도서로 추정된다. 여기서 환희는 묵주기도 중에서도 ‘환희의 신비’와 관련된 기도문으로 추측된다.

묵주기도 자료와 성모 공경을 위한 기도로 활용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삼종경」(삼종기도), 「성모경」(성모송), 「성모덕서도문」(성모호칭기도) 등 책자도 눈길을 끈다.

전문가들은 신앙 선조들이 기도서와 묵상서들을 통해 성모, 마리아, 자모(慈母), 모후(母后) 등 성모 마리아의 호칭 의미와 함께 묵주기도나 묵상을 통해 성모 신심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얻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프랑스 선교사 중에서도 앵베르 주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묵주를 많이 만들어 보급했다. 이로써 일상생활에서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와 성모 마리아 일생에 대해 묵상할 수 있도록 했다.


■ 죽음이 임박해서도 묵주기도

1791년 신해박해 시기에 하느님의 종 권일신(?~1792) 집에서 「매괴경」(玫瑰經)이 발견된 것은 초기 신앙 선조들 가운데서 성모신심과 관련해 가장 먼저 드러난 기록이다.

모방 신부 복사를 지냈던 성 이문우(요한, 1809~1840)는 탁월한 성모신심으로 돋보이는 인물이다. 옥에 갇힌 뒤에도 천주가사 「옥중제성」과 「삼덕가」를 지으며 당시 조선교구 주보였던 성모 마리아를 찬미했다. 옥중서한에서도 “끊임없이 성모 공경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정하상 성인의 모친 성 유조이(체칠리아, 1761~1839)는 죽는 순간까지도 성모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거나 감사 기도를 드렸다.

「병인치명사적」에 따르면 1869년 죽산에서 순교한 유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된 뒤에도 “묵주를 꺼내 목에 건 다음 십자고상을 앞에 모시고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수원지방 순교자 성 최형(베드로, 1814~1866)은 묵주를 만들어 보급한 것으로 유명하다.

병인박해기에 와서는 묵주기도를 통한 자발적인 성모 공경이 보편화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병인순교록」에도 옥중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당시 명도회를 비롯해 다양한 신심 단체들이 있었는데, 그중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시한 단체 중 하나인 ‘매괴회’는 묵주기도를 통해 신심을 함양하는 성격을 지녔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다블뤼 신부가 교우촌 순방 때마다 미사와 성사 집전 후에 “신자들을 매괴회와 성의회에 입회시키는 일을 한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묵주기도가 신자들의 중요한 신심 도구였음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성모신심과 묵주기도에 대한 애정도 주목된다.

김대건 신부 서한 내용을 참조할 때, 김대건 신부는 만주 변문에서 조선교회에서 온 밀사들을 기다리며 수없이 묵주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최양업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많은 성모 마리아 상본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또 묵주를 만드는 도구나 자료들을 많이 청한 것을 읽을 수 있다.

묵주가 아닌 도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은 당시 조선교회 교세가 증가함에 따라 예비신자들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묵주가 더 많이 필요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는 신자들에게 묵주를 간직하고 다니면서 자주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가르치려는 데 쓰려던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김연이 율리안나가 폐궁인 양제궁에서 궁녀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탁희성 화백의 작품.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

출처: 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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