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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서거 직전 귀의한 ‘백범 김구 베드로’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9-08-27 조회수 : 1022


  • [앵커] 올해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100년 전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생전에 천주교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는데요.

    숨을 거두기 직전 대세를 받기까지, 인연의 끈을 되짚어보겠습니다.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지막 날이었던 1948년 8월 15일.

    백범 김구 선생은 네 글자의 유묵을 남겼습니다.

    한운야학,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 아래 노니는 들녘의 학이라는 뜻입니다.

    해방 이후 남북 통합 정부가 무산된 애달픈 마음을 학으로 표현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당시 이 유묵을 박병래 성모병원장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로부터 10개월 후, 박병래 원장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김구 선생이 총을 맞고 쓰려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박 원장은 즉시 달려가 인공호흡을 했지만, 김구 선생은 끝내 숨을 거뒀습니다.

    바로 그 긴박했던 순간, 박병래 원장은 김구 선생에게 대세를 주었습니다.

    <맹광호 이시도르 / 가톨릭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김구 선생님의 주치의였던 성모병원 원장 박병래 선생님이 연락을 받고 병원의 간호 수녀님을 대동하고서 현장으로 가서 임종을 확인하고 간단하게 염습도 한 다음에 그 세례명을 베드로로 해서 대세를 드립니다."

    김구 선생과 박병래 원장의 연결 고리가 된 인물은 김구 선생의 며느리이자 비서인 안미생이었습니다.

    안미생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안정근 선생의 둘째 딸입니다.

    천주교 집안에서 자란 안미생은 수산나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안미생은 숱한 암살 위협에 시달려온 김구 선생을 아무 병원에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1945년 성모병원에서 탈장수술을 받도록 했습니다.

    주로 내과와 소아과 진료만 이뤄지던 작은 병원에서 민족의 지도자가 외과 수술을 받은 건 가톨릭 병원, 무엇보다 박병래 원장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김구 선생과 박병래 원장의 인연은 퇴원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단지 환자와 의사가 아니라, 수시로 만나며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두 사람이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가 된 건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경교장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김구 선생 바로 옆에 박병래 원장이 있습니다.

    1949년 7월 5일, 김구 선생의 영결식 사진에도 박병래 원장이 등장합니다.

    <맹광호 이시도르 / 가톨릭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장례식장 단상에 박병래 선생님이 상복을 입고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인 김신 씨와 같이 서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말하자면 이미 박병래 선생님은 그만큼 김구 선생님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증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김구 선생은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손녀 김효자도 박병래 원장에게 맡겼습니다.

    김구 선생은 무엇을 믿고 자신보다 27살이나 어린 박병래 원장에게 손녀를 맡길 수 있었을까.

    <맹광호 이시도르 / 가톨릭대 의과대학 명예교수>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정말 충실히 실천하신 신자이면서 가톨릭 의사이시죠. 자신이 가진 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온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 동안 쓰셨고, 재산의 거의 전부를 교회에 바치신 분입니다."

    김구 선생이 박병래 원장의 인품을 흠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박병래 원장은 김효자가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까지 약 20년 동안 친딸처럼 돌봤습니다.

    김구 선생과 천주교의 인연은 또 있습니다.

    임시정부 시절, 항일운동을 지원하는 중국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와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눈을 감기 직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건 정말 김구 선생의 뜻이었을까?

    <맹광호 이시도르 / 가톨릭대 의과대학 교수>
    "(박병래 원장이) 왕진을 갈 때마다 가톨릭으로 귀의하시라고 권유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김구 선생의 왕진을 따라갔던 수녀님 한 분의 증언 기록을 보면 "가톨릭으로 귀의하시죠"라고 했더니 "알았소. 나도 죽기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겠소"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 평화가 이뤄지길 희망했던 백범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가 되는 올해, 김구 베드로의 정신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앵커 리포트였습니다.


    출처 : 가톨릭평화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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