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1일자 수원주보 5면
신앙에세이
언제나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무성한 풀섶 사이 쓸쓸한 강둑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처녀여, 당신은 망토로 등불을 가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내 집은 캄캄하고 적적하니, 당신의 등불을 좀 빌려주십시오.” 그녀는 잠시 검은 눈을 들고 황혼 속에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햇빛이 서쪽으로 기울 때 내 등불을 흐름 위에 띄우려고 강으로 나왔어요.” 나는 부질없이 조류에 떠다니는 그녀의 등불에서 불길이 머뭇거리는 것을 보았지요.
깊어가는 밤의 고요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처녀여, 당신의 등불은 모두 켜졌군요. 그런데 당신은 등불을 가지고 어디로 가십니까? 내 집은 캄캄하고 적적하니, 당신의 등불을 좀 빌려주십시오.” 그녀는 내 얼굴을 향해 검은 눈을 들곤 잠시 의아한 듯 서 있었습니다. “나는 저 하늘에 내 등불을 바치려고 나왔어요.” 나는 부질없이 허공 속에 타오르는 그녀의 등불을 지켜보았습니다.
한밤중 달도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처녀여, 당신의 가슴 가까이에 등불을 들고 당신이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집은 캄캄하고 적적하니, 당신의 등불을 좀 빌려주십시오.” 그녀는 잠시 멈추어 생각을 하다가 어둠 속에서 내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내 등불을 축제에 한 몫 끼우려고 들고 나왔어요.” 나는 서서 뭇 등불 사이에서 부질없이 사라지는 그녀의 작은 등불을 보았지요.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신께 바치는 노래”(Song Offering)라는 뜻을 가진 <기탄잘리>에 나오는 글이다. 이 시집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타고르는 191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영국 시인 예이츠는 시집 서문에서 “나는 이 번역 원고를 여러 날 동안 가지고 다니면서 기차 안에서, 버스 좌석에서, 또는 레스토랑에서도 읽었다. 나는 어떤 낯선 이가 내가 이 시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알아차릴까봐 가끔 책을 덮어야 했다.”고 했다. 그만큼 이 글은 아름답고 애잔하며, 하느님을 갈망하는 ‘가난한 마음’이 잘 배어 있다.
우리 인생이란, 처녀가 들고 있던 등불처럼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뼈아프게 절감한다. 이곳저곳 이 일 저 일 뭔가 있지 않을까 기웃거리지만 마음 둘 곳 찾지 못하고, 남이 칭찬하는 공덕조차 죽음 앞에선 위로가 되지 않는다. 사제든 평신도든 교사든 목공이든 하물며 수도자라 해도 다를 바 없다. 거창한 대의마저 때로 허망한 게 인생이다. 타고르의 시를 읽으며 내내 마음을 졸인다. 등불이 마저 사라지기 전에, 한 영혼의 “캄캄하고 적적한 방이라도 밝히라고” 그 등불을 내어줄 수 있었다면…. “등불 좀 빌려달라.”는 간청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언제나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오고, 이미 등불은 꺼지기 일쑤였다.
글.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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