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신앙선조들이 기도하던 그 자리 그대로
국가에서는 조상들이 남긴 유산 중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을 ‘문화재’로 정해 보호한다.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교회 230년 역사 안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신앙을 지키고자 한 신앙선조의 희생과 노력은 과거에만 머물러있지 않다. 오래된 성당 건물, 낡은 십자가 등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옛 것들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가치있는 과거의 유산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앙선조의 흔적이 담긴 교구 내 문화재를 살펴본다.
‘삐그덕 삐그덕’
100년의 역사를 품고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성 성당(경기도 안성시 구포동 80-1). 신발을 벗고 성전 안으로 발을 내딛자 오랜 시간을 머금은 소리들이 방문객을 먼저 반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나무로 지어진 성당은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가난해 먹고 살기 힘들어도 가장 단정한 옷을 챙겨 입고 미사를 드리러 왔을 신앙선조들의 발길, 손길이 닿은 곳이라고 생각하니 그 냄새마저도 정겹다.
이 성당은 1901년 프랑스 신부 공베르에 의해 처음 건립됐다. 이후 1922년에 재건된 것이 지금 남아있는 건물이다. 안성본당의 초대주임이었던 공베르 신부는 1922년 3월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공베르 신부는 프와넬 신부의 설계를 토대로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성당을 완공했는데 기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을 헌 재료를 이용했고 목재는 압록강변과 서산 지방의 것을 썼다고 전해진다.
프와넬 신부가 설계한 성당의 입구는 서측에 위치하며 중앙에는 회중석이 있고 동쪽 끝에는 제단이 있어 서양식 성당의 공간 구조와 유사하다. 한편 건축 재료와 결구는 전통적인 방식이 적용됐다. 이처럼 한·양 절충식 건물인 안성성당은 성당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되며 1985년 경기도기념물 82호로 지정됐다.
■ 동서양, 신구의 조화 모두 느낄 수 있는 성당
동양과 서양의 건축양식을 모두 갖춘 성당은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변신한다. 1955년 개축된 전면 입구는 서양의 건축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뾰족한 탑과 둥근 아치형 입구는 중세 유럽의 건축양식을 닮았다. 입구를 옆에 끼고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둥근 서까래가 걸린 지붕에 예쁘게 앉아 있는 기와 덕분에 이 곳을 찾는 신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묵상과 운치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성당에서는 동서양 뿐 아니라 신구의 조화도 발견할 수 있다. 성당 건너편에 지어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노출 콘크리트 기법을 활용, 붉은 벽돌의 옛 성당 모습과 대비된다. 옛 성당에서 ‘빛의 은은함’을 느낄 수 있다면 새 성당에서는 ‘유려하게 흐르는 빛의 흐름’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제대 위에 사각형의 천창을 배치하여 말씀을 뜻하는 빛의 생명력을 강조했고, 성당 입구 상부 벽에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사각형 창을, 신자석 옆에도 창을 내 곳곳에 번지는 빛과 함께 기도에 집중할 수 있다.
■ 공베르 신부의 흔적 찾으며 신앙심 고취
1901년 성당 마당에 심은 독일산 포도 묘목이 의외로 탐스런 과실을 맺자 공베르 신부는 안성지역이 포도재배에 적합한 기후 및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도 힘을 기울였던 공베르 신부는 여러 차례 프랑스를 오가며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았고, 이를 적극 보급해 안성포도의 효시가 됐다.
또한 성당 주변의 토지 50만 평을 매입해 이웃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며 나눔을 실천했다. 안성 성당은 공베르 신부의 뜻을 기려 그가 안성에 처음 심었던 포도와 같은 종자를 구해 성당 뒤편에 심었다. 피부색은 달라도 하느님을 따르는 마음만은 같았던 한국의 신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공베르 신부. 그가 이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성성당의 한켠에서 무럭무럭 열매를 맺고 있었다. ※관람문의 031-672-0701 안성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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