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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재건을 위해 서울과 이천을 오갔던 남이관 조증이 부부 순교 성인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19-07-05 조회수 : 1079

2019년 7월 7일자 수원주보 4면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8


교회 재건을 위해 서울과 이천을 오갔던 남이관 조증이 부부 순교 성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1780년~1839년)는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충주 출신 남필용의 4남매 중 막내로, 이천 출신의 조증이 바르바라(1782년~1839년)와 결혼하였다. 1801년 부친이 체포되자 남이관은 처가인 이천으로 피신했으나 붙잡혔다. 이후 부친은 전라도 강진에서, 남이관은 경상도 단성에서 각각 귀양살이를 했다. 1832년경 유배지에서 풀려난 남이관은 처가인 이천으로 가서, 아내 조증이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아내의 외척인 정하상 바오로를 도와 교회 일을 하기 위해서 서울로 이사했다. 남이관은 정하상 등과 함께 의주까지 가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모셔와 서울 살리뭇골(중구 산림동)의 자기 집에 모셨다. 남이관, 조증이 부부는 그 후 프랑스인 모방 신부도 모셔와 비밀리에 신자들을 불러 성사를 보게 하는 등 공소회장의 역할도 했다.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남이관은 서울을 떠나 이천의 다래촌(대월면 구시리)으로 피신했으나 신자의 밀고로 그를 추적해 온 포졸들에게 잡혀, 압송됐다. 포도청, 의금부, 형조를 차례로 거치면서 심문과 재판을 받은 그는 무수한 구타와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굳게 지켜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한편, 기해박해 때 조증이도 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았다. 남편의 행방을 묻는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천주를 배반하라며 가하는 5회 이상의 고문과 180대 이상의 형장(매질)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매질로 온몸에 고름이 흐를 정도였지만 조증이는 의연하였다. 또한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례나 심문을 받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꿋꿋하게 고통을 참아냈다. 그리하여 조증이도 마침내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다.


   먼저 사형집행을 당하게 된 남이관은 여자 옥사의 옥졸을 통해서 아내 조증이에게, “우리 부부가 같은 날 죽기로 약속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게 되었소. 하지만 적어도 같은 곳(형장)에서 죽읍시다.”라는 말을 전했다. 남이관은 1839년 9월 26일 60세에, 조증이는 1839년 12월 29일 58세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남이관, 조증이 부부 순교 성인이시여, 저희 부부도 당신들과 같이 변함없는 신앙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복음 실천의 삶을 살면서 해로하도록 전구해주소서. 아멘.


글.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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