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30일자 수원주보 5면
신앙에세이
오십 이후의 나는 한 마리 개처럼 살고 싶다
유년 시절, 나는 ‘똘이’라는 강아지를 키웠다. 개를 안고 다니거나 개에게 옷을 입히는 일은 있을 수 없던 시절, 나는 내 옷 중에 작은 것을 골라 강아지에게 입혀서 안고 다니곤 했다. 겨울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며 멀리서부터 똘이를 부르면, 똘이는 신작로를 쏜살같이 달려서 내게로 왔다. 둘이 걸으면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날개도 등불도 아니고 곁에서 걷고 있는 친구의 발걸음 소리이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아포리즘’으로 옛 친구를 불러본다. 그 해 여름 땡볕이 스러지면 들판으로 나가서 매어둔 소를 데리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고 소꼴을 벨 때도 똘이는 내 곁에 있었다.
그런데 넉넉지 않은 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어머니가 개를 키우는 목적은 다른 것이었다. 강아지 똘이의 덩치가 커진 뜨거운 삼복 중의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똘이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청년들이 똘이를 사서 데려갔다고 했다. 말을 할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소꼴을 베다 낫에 손을 베어 동네 약국에 다니며 치료 중이었다. 지금도 왼손에 흉터가 남아있는 걸 보면 작지 않은 상처였다.
예수의 죽음과 나의 일상은 특별한 관계없이 흘러간다. 그러다 소꼴을 베다 낫에 손을 베이는 날처럼, 내 안의 슬픔이며 어리석음에 베이고 세상의 적의에 떠밀려 세상 밖으로 밀려나 나도 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중 어느 하루, 나는 나환자 시몬이 예수를 집으로 초청하여 먹고 마시던 구절(마르 14.3-9)을 온종일 되풀이해서 읽는다. 나환자가 되어 그분을 초대하고 기다리다 지치면, 영혼 깊은 곳에 손금처럼 각인된 길을 따라 그분을 찾아 나섰다. 어둠과 빛의 긴 스펙트럼 위를 걸어서.
그분은 ‘자청해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다. 흰눈이 내려 세상을 덮듯 예수가 걸어간 십자가의 길은 나의 운명과 숙명을 홀연히 천명의 아우라로 변모시키는 에너지로 작용하며 내 안의 슬픔과 어리석음을 덮었다.
후일, 어머니는 똘이를 팔아서 밀린 비료값과 내 약값을 갚았다고 했다. 나는 한 마리 개가 내게 보여준 헌신을 갚았던가? 생명이 시들어가는 누군가 나를 부르면 그에게로 가서 봄비처럼 그의 소생을 도운 일은 있었나? 오십 이후의 나는 한 마리 개가 되어 살고 싶다. 그분이 걸어간 외롭고 쓸쓸한 길 위에 작은 그림자를 보태면서.
글. 이규원 사라(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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