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30일자 수원주보 4면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 7
‘천상과거’를 위하여 배교의 유혹을 뿌리쳤던 이문우 요한
1801년 신유박해부터 1830년대 중반까지 양근, 광주, 이천 등지에 100여 명 이상의 신앙공동체가 존재한 것과는 달리, 남한강 유역의 초기 천주교회 중심지 중 하나였던 여주에는 소수의 신자만이 겨우 남았다. 그러나 병인박해 무렵 여주에는 다시 선교사가 방문하여 각시울, 원심이 등의 공소가 세워졌다. 여주와 함께 초기 한국교회 남한강 지역 거점의 하나였던 이천은 여리양광(여주-이천-양근-광주) 중에서도 비교적 내륙 깊숙이 있던 관계로 신유박해의 광풍을 덜 받았다. 따라서 이천에는 병인박해 때까지 단내(호법면 단천리), 소리울(모가면 송곡리), 진안(모가면 진가리) 등지에 신앙공동체가 존속했다. 181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조선교회 재건운동의 주역들이 이곳 이천 출신으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는 중요한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이천 출신의 이여진은 양근의 권기인(상립), 권노방(상술) 등과 함께 1811년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가 조선교회 재건을 위한 방책을 제시하고 성직자 영입을 강력히 요청했다.
이천 동산밑(호법면 동산리)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문우 요한(1809~1840)은 다섯 살 때 부모를 잃은 후, 오 바르바라의 양자가 되어 서울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이문우는 아내와 자식들이 일찍 죽자 곧 신앙생활에만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문우는 모방 신부의 복사가 되어 1년 동안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많은 신자가 감옥에 갇히자 성금을 모아 정성껏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또한, 은신한 주교와 사제들에게 박해와 교회의 소식을 전달했고, 순교한 선교사와 신자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장사를 지내기도 했다.
1839년 11월 11일(음 기해년 10월 26일) 체포된 이문우는 배교의 유혹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함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정서이나 임금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만물의 주인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문우는 1840년 2월 1일 서울 당고개에서 31세의 나이로 참수형 당했다. 그는 포도청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작성한 ‘옥중제성’(獄中提醒)이란 천주가사에서 ‘순교를 천상과거 합격으로, 배교를 불합격’으로 비유하면서, 자신의 순교의지를 굳힘은 물론이고, 다른 신자들도 항구한 신앙심으로 순교하도록 권면했다.
글.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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