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자 수원주보 4면
수원교구 기해박해 순교자의 삶과 신앙4
양근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하)
장사광 베드로(1787~1839)는 서울 출신 양가(良家)의 자손이었고, 손 막달레나(1784~1839)는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회장 손경윤 제르바시오의 딸이다. 1792년 이전에 장사광은 양근의 한감개로 와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가, 권일신이 죽고 1801년 신유박해가 닥치자 곧바로 냉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부인 손 막달레나가 남편의 회두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다시 신앙을 갖도록 간곡히 권면한 결과, 1828년경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장사광은 보다 확실한 믿음살이를 하기 위해서 집안의 제사를 폐지하고 위폐를 불살랐을 뿐 아니라, 유교적 제사를 강조하는 향교(鄕校)의 명단에서 스스로 자기 이름을 삭제했다. 그리하여 그는 양반의 체모(體貌)를 버리고, 술을 완전히 끊는 등 절제의 삶을 살면서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집중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입국하자 장사광 부부는 곧바로 성사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앙심이 더욱 굳건해져서 신자의 본분을 힘써 지켜나갔다.
이들의 소문을 들은 양근군수는 1839년 8월 장사광과 손 막달레나는 물론이고 그의 두 아들까지 모두 체포하여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다. 군수가 부부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에 장사광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인정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아이들의 괴로움은 저희의 괴로움보다 백배나 더 고통스럽지만, 이 때문에 천주님을 배반하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신앙을 고백했다. 군수는 감사의 지시를 받고 그들 부부를 고문하고 협박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아이들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부부는 음식제공조차 금지당한 상태에서 문초와 형벌을 참아 받다가, 장사광은 1839년 12월 18일(음 11월 13일), 손 막달레나는 이보다 4일 후인 12월 22일(음 11월 17일)에 각각 52세, 55세의 나이로 옥중순교했다. 이들 부부의 신앙고백은 구약성경에서 외아들 이사악마저 서슴지 않고 하느님 제단에 바쳤던 아브라함의 항구한 믿음을 연상하게 한다.
“하느님의 종 장사광 베드로와 손 막달레나 부부시여, 하느님을 만유 위에 가장 높이 사랑하신 당신들의 믿음을 저희 모두가 본받게 하소서. 아멘.”
글. 원재연 하상바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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