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6일자 수원주보 5면
신앙에세이
초여름의 하루
연극이 끝난 뒤 세트만이 덩그러니 남은 무대를 보면 막막한 심정이 된다. 배우들이 움직이며 대사를 하고 그 위로 조명을 비추고 음악이 흐르면 무대 배경 세트는 사람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소로서 열기를 뿜어내지만 연극을 종료하면 그야말로 폐허의 허접한 쓰레기로 변질되고 만다.
대본을 쓰고 제작 전 과정을 총괄하고 공연이 끝나면 세트를 뜯어서 외곽도시 산기슭의 컨테이너에 넣어 보관하는 일이 지난 일 년간 나의 역할이었다. 혼자 감당하기에 벅찼다. 그 여파로 다리에 경직이 일어나 정형외과 치료를 받으며 모든 공연을 가을로 미뤘다. 무대 세트를 창고에 넣고 자물쇠를 잠그며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시퀀스가 떠올랐다. 노인은 거친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잡은 거대한 물고기를 끌고 항구로 돌아오지만, 물고기는 상어떼에 먹히고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노인의 심경이 데칼코마니처럼 그대로 내 가슴에 찍혔다. 유(有)와 무(無) 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우리들의 초상이었다.
호로록호로록 라면을 먹는 듯한 산새의 노래가 컨테이너가 놓인 건물 너머 숲에서부터 따라오며 내 머리 속에 집을 지었다. 전철을 타고 잠실역에 내려 커피를 한잔 사서 마시며 석촌호수로 들어서자, 산책하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피아노로 연주하는 ‘썬라이즈 썬셋’을 듣고 있었다. 이 곳 호숫가 나무데크에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어 누구라도 언제든 연주할 수 있다. 주말이면 젊은이들의 버스킹이 열리는 공연 무대이다. 가까이 가서 보니 호숫가에 사는 노숙자 아저씨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살림살이를 담았을 법한 큰 박스를 작은 수레에 싣고 다니는 아저씨였다. 한낮의 땡볕 사이로 음악이 흐르며 황혼과 일출의 장관이 펼쳐졌다. 그분의 일생 중 ‘스위트 홈’에서 피아노를 치던 모습을 가려진 커튼 사이로 얼핏 보았다는 느낌이었다. 우렁각시가 저녁밥을 짓는 풍경을 마주한 것 같은 비현실 속에서 옹색한 현실에 나를 매어놓은 고삐가 스르륵 풀리는 것 같았다.
비록 물고기의 뼈만 남았을지라도 홀로 난바다에서 격전을 벌인 일은 뭍에 오른 노인의 숨결에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기운을 어리게 하는 유(有)의 여정이었다. 일상의 남루함을 깨고 잠깐 드러난 노숙자 아저씨의 피아노 연주는 먼저 연주자 자신의 정체성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가을이 오면 창고 안의 세트도 공연 무대에 세워져 스위트 홈으로 변모할 것이다. 줄장미가 피고 까치가 날아가고 내가 커피를 마시며 걷는 초여름의 이 시공간, 참 좋다!!
글. 이규원 사라(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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