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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01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3-03-01 조회수 : 407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운동, 또 다른 31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또다시 31절입니다.
혹독하고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하루하루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 이건 정말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 누구로부터 지배되지 말아야 할 자주 독립 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입니다. 
 
은혜롭게도 저희 공동체 지척 거리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립운동가의 생가가 있어 자주 들르는 편입니다.
33인 대표이며, 31운동의 효력이 미미해지자 제2의 31운동까지 기획한 옥파 이종일 선생님(1858-1925)이십니다. 
 
이분은 1894년 보성학교 교장에 취임한 이후 전국 각지의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한국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31운동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직접 독립선언문을 인쇄를 주도하고 낭독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물론 지금도 어마어마한 양인 자주독립선언문 3만 5천부를 인쇄해 배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연히 일제 총독부의 눈에 그는 존재 자체로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31운동을 주도한 죄목으로 이종일 선생님은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은 후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정도 고생했으면 심신도 완전히 망가졌겠다, 만사 제쳐놓고 휴양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이종일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어찌 내 한 몸만 걱정하겠냐며 또다시 독립운동을 기획합니다. 
 
31운동 3주년인 1922년 3월 1일에 맞춰 주도면밀하게 행사를 준비하고 유인물을 인쇄하여 준비를 마쳤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한결같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던 이종일 선생님의 황혼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 못지않게 무척이나 서글픕니다. 
 
정처 없이 그리고 기약 없이 떠돌던 그의 육신은 1925년 8월 31일 꿈에 그리던 고향 태안이 아니라, 물설고낯선 땅, 경성 종로 평동 으슥한 뒷골목 거적 대기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거저 이룩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종일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여 큰 물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한독립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또 다른 항일운동, 제2의 31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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