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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2-04-28 조회수 : 1916

말은 곧 사람이다; 말씀(말+숨)이 흐르게 하라  
 
  
 
오늘 복음도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이 설명하려고 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아드님이 하느님이 되시는 방식입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요한 3,34)
이 짧은 문장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아드님을 통해 당신 ‘말씀’을 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게 하시는 힘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주시는 피입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나의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신다기보다는 나의 말을 불태우십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쉼 없이 재잘대는 자아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나는 자아와 하나가 되고, 반면 성령으로 자아를 죽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받아 전하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정은표 씨가 주말에 자녀들이 공부하지 못하게 농장에 가자고 할 때 자녀들은 공부해야 한다고 반대합니다.
이때 김하얀 씨가 어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 토를 다느냐고 남편 편을 듭니다.
그렇게 그들은 주말농장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습니다.
김하얀 씨는 여기에서 남편의 말을 받아 전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남편의 사랑입니다.
남편의 것은 다 아내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을 받아 전하는 아드님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전부인 하느님의 ‘신성’(神性)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요한 3,35)
아드님을 믿는다는 말은 ‘어떻게 사람이 하느님이 되는지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드님을 믿으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곧 신성을 받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하신 성경 말씀을 예수님은 거부하시지 않고 오히려 옳은 말로써 당신의 주장을 위한 근거로 삼으십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신이라” 한 말씀은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신이 되셨습니다.
본래 신이시지만 세 분이 한 신성으로 하느님이 되셔야 하기에 누군가는 파견하고 누군가는 파견받고 누군가는 파견하신 분의 말씀이 파견된 이를 통해 전해질 수 있도록 힘을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세 분이 한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화 ‘바람’(2009)는 유명 배우 정우의 실제 고등학교 이야기입니다.
정우는 엄한 아버지와 더 무서운 형 밑에서 자랐습니다.
형과 누나는 공부를 잘했지만, 정우는 공부를 못하여 상고에 진학합니다.
상고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담배 피우고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는 일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버지와 형에게 꼼짝 못 했습니다.  
 
그런데 불시로 학교 폭력을 조사하러 나온 경찰들에 의해 구치소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나오기는 했지만, 부모님은 정우가 빼앗은 돈의 열 배씩 돌려줘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정우의 가방 속의 담배를 보고 뺨을 때리고, 형은 더 심하게 때렸습니다.
그런데도 정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간암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정우는 그때부터 아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목욕탕에서 등을 한번 밀어드리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로 돌아옵니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우는 장례식장에서 오열합니다.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아버지 사랑합니다.”
군대에서 돌아온 형은 정우를 보고 “다 컸네!”라고 합니다.
정우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갑니다.  
 
며칠 전에도 예로 들었듯이 ‘파친코’에서 솔로몬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줄 알면서도 할머니에게 계약서에 사인하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자신 안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사인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우도 자신의 말을 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버지와 형의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오는 것은 피이고 성령입니다.
말로만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말을 하게 만드는 힘이 성령, 곧 피여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정우는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제 아버지처럼 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의 말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자아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선생님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으며,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말이 곧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피를 준 이의 말을 하도록 합시다. 
 
정우는 친구들이나 선배의 말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모만큼 자신에게 피를 흘리며 말을 가르친 이들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곧 누군가를 계시하고 그 누군가가 내가 됨을 잊지 맙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말씀을 ‘말’(진리)과 ‘숨’(은총)의 결합이라고 하듯, 성령과 함께 오시는 말씀만이 나에게 생명을 줍니다.
우리는 생명이 섞인 말씀을 받아 전하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창조자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타자의 생명을 먹고 생존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말을 받아 전하는 것이 곧 그 말씀을 하시는 분과 하나가 됨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기 위해 그분께 다가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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