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제 기도만 들어주시면 성지에 큰 봉헌을 하겠습니다.”
갑곶성지를 처음 개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에게 어떤 분이 와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자신이 커다란 봉헌을 해야지만 성지가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느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부족으로 성지개발을 직접 못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봉헌을 통해서만 성지개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창기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어서 이분께서 봉헌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봉헌은 없었고 또 그 뒤로 뵐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어쩌면 스스로 하느님 영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이 땅을 사는 우리 역시 겸손한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의 모습으로 엎드려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들이 그랬듯이,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있음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인·성녀들은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마귀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루카 4,41)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되는 대상을 향해 감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귀를 향해서는 함구령을 내리시지만, 두려워하며 겸손의 모습을 갖춘 베드로를 향해서는 사람을 낚는 큰 사명을 내려주셨음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혹시 하느님을 내 밑에 두고서 명령을 내리는 하인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두려워하며 겸손한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코로나 사태가 생기기 전, 강의가 참 많았습니다. 외부로 나가서 하는 강의도 있고, 성지에서 하는 강의도 있었습니다. 또 신학교, 방송국까지 눈코 뜰 새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의하면서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를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 전, 평소 존경하는 분에게서 들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강의하는 것 아냐.”
이 말을 들었을 때가 딱 50세였습니다. 더 이상 강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마치 많은 것을 알고 깨달은 듯 강의를 했었구나. 세상에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강의한답시고 내 공부만 하고 있었구나.’
그 뒤 신학교와 방송국 강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부와 성지에서의 강의도 저절로 멈춰진 것입니다. 역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