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보면 천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밝게 웃는 모습을 보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천사로 생각해서 그럴까요? 아기가 자신의 불편함을 표시하는 울음도 예뻐 보입니다.
언젠가 아이를 데리고 성지를 방문한 어느 젊은 부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리키며 이 부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랑 사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이 질문에 남편은 웃으면서 제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을 합니다.
“신부님, 잘 때만 천사에요.”
제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해보니 거의 모든 부모가 공감하시더군요. 그렇다면 아이도 죄를 짓는 것일까요? 맞습니다. 천사 같은 아이이지만, 이 아이도 잘못을 하고 때로는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 아이들을 닮으라고 하셨을까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철저하게 부모에게 의탁하는 모습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죄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을 믿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주님과 맺어야 하는데,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주님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 질문합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를 말씀하신 것은 하나부터 일흔일곱까지 숫자를 세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에 대해서는 용서하는 횟수도 세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매정한 종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이 나옵니다. ‘만’이라는 숫자는 고대 근동에서 계산할 때 가장 높은 단위의 수이고, ‘탈렌트’는 가장 큰 화폐 단위입니다. 엄청난 액수로서 이만큼 빚을 진 종은 갚을 가망이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오로지 주인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즉, 우리 인간도 이런 상황에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 우리의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내 이웃에게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조금의 잘못에도 용서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복수하려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십니까? 믿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따릅니다.
감탄할 일이 많아야 합니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감탄할 일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삶이 힘든 건 감탄사가 사라져서다. 자판기 앞에서 혹은 식사 때 ‘와’, ‘이야~~’를 연발한다면 함께 하는 사람들과 정서적 자아실현을 이루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와~~”하고 감탄하고, 운전하다가도 안전 운전과 모범운전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와~~”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책을 보다가도 얼마나 많은 감탄을 쏟을 수 있습니까?
생각해보니 감탄하지 못해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감탄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