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생활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새 후배의 숫자가 많이 늘었고 그러다 보니 이름을 잘 모르는 후배 신부님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피부의 주름과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오십이 넘는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논어 위정편에 보면, 나이 오십을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으로 비유하지요.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면, 겸손보다는 교만의 모습이 더 많지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은 분명히 ‘지천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지금도 변함없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동창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에, 한 친구가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너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 그렇게 경박하게 굴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이제 체통 좀 지켜라.”
이 말에 별일 아니란 듯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 나와는 상관없어. 게다가 남들의 웃음거리를 면한다고 해서 내가 고상해지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입니다. 남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삶이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말을 했나요? 사람들은 당시에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 고향이니까요. 따라서 예수님도 고향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고 계셨을 것이고,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더 좋은 말씀과 놀라운 행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낫다면서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대접받고 인정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주님의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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