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좋고 싫고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이해해보면 다른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방송인 중에 누구를 너무 싫어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습니다. 큰 목소리는 상대를 윽박지르는 것 같다고, 청각에 예민한 자신에게는 너무나 싫은 목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송인이 자신의 목소리가 크다는 것을 어느 방송에서 인정하면서, 귀가 어두웠던 아버지를 위해 목소리를 키우다 보니 지금의 목소리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전히 그 큰 목소리가 좋지는 않지만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감정이 생길 때, 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입장도 바꿔보고 경청도 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선택하시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편이 되셔서 큰 사랑을 계속 전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밭에 좋은 씨만 있는 줄 알았는데, 원수가 뿌린 가라지가 자라고 있습니다. 종들은 가라지를 뽑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만류합니다. 가라지를 깨끗하게 없애겠다고 뽑아내다가 같이 있는 좋은 밀까지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시지요.
지금 우리의 잘잘못을 곧바로 따지고 벌하시는 주님이십니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 있으며 때로는 뻔뻔한 모습으로 주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냥 뽑아서 제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시간을 허락해주십니다. 이는 좋은 밀이 될 시간으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원하시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에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까요? 죄를 지어도 가만히 놔두는 모습에, 힘없는 주님이구나 하면서 더 큰 죄를 짓는 못된 가라지가 되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나의 이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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