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라고 말하면 아마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만 같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되고 대립해 있는 상태의 산물로 여겨지는 싸구리 정치이념에 따라, 남한(대한민국)에서는 ‘동무’라는 말이 금칙어 비슷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가며 이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어깨동무, 내 동무. 미나리 밭에 앉았다.”
분명히 많이 썼던 ‘동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조건 ‘친구’로 써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자동으로 부여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무’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 말입니까? 이 말을 쓰지 않다 보니 이제는 더욱 어색하고 낯설게만 느껴집니다.
단어도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으면 이렇게 낯설게 됩니다. 어쩌면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떤 분은 나중에 할 일이 없을 정도로 여유가 생기면 그때 주님을 믿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때 과연 주님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동안 주님을 부르지 않고, 주님을 만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중의 그 시간은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믿기 힘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많은 대화를 나눠야 낯설지 않은 친밀한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 모든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님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감사의 기도를 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아니면 아무거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말입니다. 아마 모두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철부지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진실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의지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있으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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