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에제 2,2-5)
사제로서 바빌론으로 압송된 후 유배민들을 위한 예언자로 불림을 받은 에제키엘이라는 인물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구원되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힘차게 전하고 있는 하느님의 사람을 발견한다. 그러나 유배민들에게 에제키엘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과장해서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로 취급되었으며, 때로 기이한 몸짓으로 말했던 이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마음이 굳어 있었으며 회개로부터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 제2독서(2코린 12,7ㄴ-1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계시 중에 자신에게 부여하신 놀라운 힘을 의식한다. 그러나 사도는 사도직을 수행해나가면서 하느님의 사랑의 힘은 화려한 설교나 위력적인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겪은 고통 속에서 그 힘을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다. 곧 하느님의 사랑의 힘은 인간이 겪는 온갖 유형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고 다져진다는 신념이다. 그러기에 사도는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한다.
■ 복음(마르 6,1-6)
나자렛 사람 예수를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다고 믿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어찌 그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이 비천한 시골뜨기를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겠는가!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사랑의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푼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기적은 하나의 기이한 현상에 불과할 뿐,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징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김]
■ 성경의 예언자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말씀을 선포했던 사람들이면서도, 누구 하나 고통의 가시밭길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다. 특히 에제키엘처럼 동족들에게 범죄를 고발하고 응당한 대가를 예고해야만 했던 경우, 그 고통의 크기는 무한하기만 했다. 예언자로서의 삶에서 멸시와 따돌림은 떠날 줄을 몰랐으나, 굽힐 줄 모르는 정신과 자세로 예언직을 수행해나감으로써 이들은 참 예언자, 말씀으로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통해서 대예언자이신 그리스도를 준비했던 사람들이다.
■ 세례성사를 통하여 왕직과 사제직과 함께 예언직을 부여받은 우리가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앙으로 묵상하고 실천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힘차게 전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힘이 없으며, 이를 숨김없이 고백한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우리의 힘없음을 통하여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기에 우리는 용기를 되찾으며, 구약의 예언자들과 대예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르치셨듯이, 그 어떤 어려움도 예언직 수행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확신으로 오늘도 온몸으로 말씀을 전한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은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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