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3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57-66
세례명이 왜 중요한가? 이름은 무의식을 담는 그릇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서 할례를 받는 내용입니다.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면 아브라함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이전의 내가 잘려 죽고 하느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할례가 신약으로 오면 세례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할례를 통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주신 이유는 새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새로 태어나면 갖게 되는 것이 본성이고 그 본성은 새로운 이름 안에 갇힙니다.
오늘도 하느님은 즈카르야의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의아해합니다.
당시 요한은 흔한 이름이기는 하였으나 즈카르야 가문 이름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즈카르야는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씁니다.
그러자 묶였던 입이 열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왜 이름을 인간이 짓는 것보다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그리 중요할까요?
그 이름을 누가 지어주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1971년 스탠퍼드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대학교 지하에 모의 감옥을 만들고 2주 동안의 사회심리학 실험 지원자를 모집했습니다.
건강한 남자 대학생 24명을 선발해 추첨으로 교도관과 죄수로 나누었습니다.
실제 상황과 같이 연출하기 위해 어느 일요일 죄수들은 실재 범인처럼 체포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실제로 하는 것처럼 알몸 검사와 분말 소독을 진행하고 발에는 쇠사슬을 채웠습니다.
1일: 교도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 교도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수감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언어가 폭력적으로 변했습니다. 저항하는 수감자들을 전부 탈의시켜 수치심을 주었으며 독방에 가두었습니다.
2일: 새벽에 교도관들은 갑작스러운 점호를 취했고 수감자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교도관들은 아무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수용소 처벌을 감행합니다.
진짜 놀라운 사실은 이 실험을 이끄는 짐바르도 교수 자신도 교도소 소장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수는 실험실 감독을 강화하고 실험실을 진짜 교도소로 옮기려고 생각합니다.
3일: 수감자들이 사제와 면담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단 2명만이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나머지 9명은 수감자 번호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단 3일 만에 실험 참여자가 아닌 진짜 수감자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수감자들은 모두 초췌해졌고 건강상의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5일: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교묘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합니다.
수감자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그들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따릅니다.
2주의 계획이었지만 이 실험은 어쩔 수 없이 단 5일 만에 종료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정신적 변화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실험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정의하는지에 따라 얼마나 무섭게 변하는지 보여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스로’란 말은 틀렸습니다.
그들에게 교도관의 정체성과 죄수의 번호를 붙여준 것은 하나의 권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믿어버림으로써 그 정체성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살펴야 하는 사실은 사제에게 자신들을 소개한 죄수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잊고 죄수 번호로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이제 자신들의 이름에서 벗어나 죄수 번호 안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자면 이름은 ‘무의식의 껍질’과 같습니다.
만약 요한이 아니라 즈카르야 주니어 정도로 이름을 지었다면 요한은 즈카르야 가문의 사제직을 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집단 무의식입니다.
우리 각자가 사는 세계는 이 집단 무의식으로 묶여 있습니다.
저처럼 삼용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트럼프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트럼프란 이름 안에 이미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것, 자라오면서 받아들인 것이 합쳐진 개인과 집단 무의식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무의식이 그 이름이라는 껍질 안에 들어있고 그 참 자신은 그 이름을 바꾸지 않는 한 그 무의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새로운 세례명을 가지게 된다면
그동안 트럼프로 묶여 있던 무의식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오리 부모에게서 길러진 백조인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의 이름을 가지게 되면 우아하게 하늘을 날게 됩니다.
오리 이름을 가지면 그저 오리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그동안 내가 믿고 받아들인 무의식입니다.
물론 그 무의식은 나의 태어날 때의 생존 욕구와 결합하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달걀 안에 노른자는 닭이 될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껍데기를 깨야 합니다.
그 껍질 안에는 나를 살게 하는 무의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요리하면 흰자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 껍데기를 깨고 나오면 달걀에서 병아리가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태어나고 그때마다 이름을 바꿉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그 세례명 안에 하느님 삼위일체의 집단 무의식인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산 이들이 우리 세례명이 됩니다.
나의 세례명이 누구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보다 그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세례명을 통해 믿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보다 그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삼용이란 이름을 인간적 아버지께서 지어주셔서 그 사회 안에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요셉이란 이름을 하느님께서 지어주셨다고 믿어야 그분의 뜻 안에 살고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세례명은 세례로 하느님 가족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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