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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2-07 조회수 : 640

2월 7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 >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말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죄책감은 그것을 죄로 고백하고 합당한 보속을 하여 공적인 용서를 받을 때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는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고해성사’란 큰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겸손하게 고백하고 보속을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서 행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라고도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헤로데는 그 다양한 예수님을 향한 시각들 가운데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 번 죽였던 요한을 두 번 못 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핑계’를 대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듯, 세상에 어떠한 죄도 핑계 없이 짓는 죄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그것은 죄야!”라고 말해주는 양심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항상 적당한 핑계를 먼저 찾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어.”,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애들이 속을 썩여서.”, “상대가 먼저 잘못한 거야.”,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랬겠어?”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해성사 때도 부쩍 ‘상담’을 하러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사제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러다가는 고해성사까지도 죄의 합리화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헤로데와 같은 상황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구원을 받으려면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
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죄는 죄라고 깨끗이 인정하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고해성사로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시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지고 그 눈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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