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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24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24 조회수 : 334

2월 24일 [연중 제7주일]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축복을 가질 수 있는 혁명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없이 다만 이웃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이 사랑의 선언도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이웃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그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를 순전히 우리에게 손해만 끼치는 상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독서: 1사무 26,7-9.12-13.22-23: 다윗이 사울 왕을 살려줌 
 
이 사랑의 능력의 예가 1독서에 나타난다. 다윗은 정병3천 명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1사무26,2)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 “야훼께서는 누구든지 참되게 살기만 하면 그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훼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붙이셨지만 저는 손을 댈 마음이 없었습니다.임금님은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 아니십니까?”(23절). 
 
여기서 사울은 다윗의 적이며 원수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원수라는 사실을 넘어 사울이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 즉 이스라엘의 합법적 대리자임을 믿고 사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계획을 보고 있다. 이것이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하겠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울로 하여금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예시로 보인다. 즉 오늘 복음의 말씀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거나 이상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6,27-38: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의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목(27-31절)은 가장 강하고 선동적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 하지 말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적개심을 능동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한다(28절).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변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고”(로마 12,21) 죄악과 증오의 폭력을 사랑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에 그리스도인은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오로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랑만이 비비 꼬여있는 폭력의 형태를 부숴 버릴 수 있고 인간관계에 깊이 박혀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다. 
 
두 번째 대목(32-36절)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하느님 사랑이 순수한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바로 창조적 사랑이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32.35-36절).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상호교환에 불과하고 상업적인 행위이고 계산이 들어있는 사랑의 유사품에 불과하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없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과 그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 하시듯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35절). 우리들이 이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재생시켜 감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35절)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랑에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실천한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대목(37-38절)이 말해주고 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로부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이 무조건적 사랑의 원인도 되시고 모델이시며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혼신을 다 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문화를 이루라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제2독서: 1코린 15,45-49: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닐 것이다 
 
제2독서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아들의 모습을 갖게될 것이고 그 모습을 이루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되고 하느님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적개심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사랑하기 시작하여 다윗과 같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줄 수 있는 삶을 노력하며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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