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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7일 _ 조욱현 토마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2-17 조회수 : 350

2월 17일 [연중 제6주일]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 5,1-12의 산상설교와 내용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평지설교의 대목을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이 설교를 산에서 하셨고 루가 복음은 산에서 내려와 하셨다고 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의 사상은 예수께서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백성들에게 해방자이며 입법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새로운’ 모세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성서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때문에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시키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 복음의 축복이 지금 현재의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즉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 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요 하다. 이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더 이상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들의 마음의 개방이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와 법에 의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부유한 자들로 여겨지듯이 물질적 재화의 풍요를 자신의 생활의 기반과 보증으로 삼는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모든 형태의 가난한 이들, 지상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 모두가 축복의 대상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고 또한 거기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J. Pikaza, Leggere Luca, Torino 1976, p. 42).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모두는 형제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진정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신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23절). 
 
제2독서: 1코린 15,12.16-20: 주님의 부활이 보증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인 것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기로 하자.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를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21절). 아멘!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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