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느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보이는 것만 믿으세요”
몇 년 전 어느 분유회사의 광고 문구입니다. 오로지 품질만을 보고 구입하라는 내용일 것입니
다. 이 광고는 어떤 믿음이나 신뢰 관계를 전제하지도, 요구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물건을 내놓는 공급자와 그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보이
는 것만 믿고 살아도 되는 걸까요?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야말로 보이는 것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선포한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가슴에 품
지 않고, 그들 눈에 비친 고향 청년이며 요셉의 아들인 예수만을 고집스럽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하기야 예전에 보았던 그 시선, 그 기억이 전부인 고향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이 마음
깊숙이 들어갈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기적을 베푸신다 한들, 그들
에게는 여전히 ‘쇼’로 보일 것이 뻔합니다. 믿음의 눈이 가려져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기적을
보여준다 해도 하느님을 받아들이거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이미 고향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한다면, 당장은 편하고 좋겠지만 결국 내 신
앙의 삶은 딱 거기까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예수님과 그분의 말
씀은 우리 삶 안에서 매번 벼랑 끝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앙이 고정관념을 뛰
어넘어 말씀을 통해 날로 거듭나고 성숙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생활 중에서
겪는 수만 가지 일들 중 나를 위한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곰곰이 묵상하고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며 형성
해 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관계를 건강하게 지속하고 풍요롭게 성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믿을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관점이 됩니다. 그에 따라 내가 보고 있는 딱 그만큼
만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저 내
가 알고 있는 전부일 뿐입니다.
갈대 구멍 같은 편협한 시야가 아닌 하느님의 시각으로 먼저 나를 바라보는 연습, 너를 바라보
는 연습, 우리를 바라보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겠습니다. 더 늦지 않게 말입니다.
글. 김창해 요한 세례자 신부(수원교구 사회복음화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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