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중반, 가난한 아일랜드 청년이 미국으로 이민 가기로 결심을 하고 배 값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은 돈으로 간신히 삼등칸 배표를 샀습니다. 하지만 식사비를 낼 돈이 없어서 빵 몇 개만 사서 배에 탔습니다. 빵을 조금씩 아껴 먹었지만 대서양을 항해하는 내내 굶주림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가 도착하기 전날, 그는 큰맘을 먹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마지막 식사만큼은 돈을 다 털어서라도 번듯하게 먹고 싶어서였기 때문입니다. 맛나게 식사를 하고 돈을 내려고 하자 종업원이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합니다.
“식사는 무료입니다. 운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섣부른 지례짐작으로 인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고 또 얻을 수 있는 것도 얻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앞선 이야기에서 식사 가격만 미리 물어봤더라면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청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담겨 있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 안에 나만 만들지 않고 이웃 역시 함께 만드셨습니다. 또한 불편함 없이 살라고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늘 주셨습니다. 그런데 시도도 하지 않고 ‘할 수 없다’라는 말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이유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우리를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쁨과 행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례짐작으로 자신은 할 수 없는 일로, 다른 이들만 할 수 있는 일로, 그래서 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대림환의 두 번째 초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땅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표시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자는 것 모두가 불편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주님을 준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고 이로써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면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을 드러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큰 기쁨과 행복을 분명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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