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에서 국어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나는 줄 것이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선생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나는 받는다.’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무엇인가를 받고 싶으면 먼저 줘야 합니다. 그런데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만 집중을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바로 우리들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풍요로운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원인은 커다란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울리고 있는 작은 외침 때문입니다. 내 것을 더 가져야 한다고, 내 것을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것 등등으로 인해서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작은 외침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배가 고픈지, 그래서 계속 갖고 싶어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지요. 사랑이 어려워지고, 행복해지기도 힘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주님께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에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지요. 부자 청년이 정말로 열심히 살았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냥 허언이 아니었는지, 주님께서도 이를 인정하시듯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에게서 부족한 면을 발견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렇게 올바른 청년이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지혜서의 저자 역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지혜 7,8-9)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야 말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물론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까지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마리의 토끼 모두를 잡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지만 주님께서는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시는 주님이십니다(히브 4,12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제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는데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바꿔서 쓰면 욕심을 빼면 뺄수록 행복은 자꾸 더하기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을 빼면 뺄수록 분명히 주님을 따르면서 계속 더해 나가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울상이 되어서 주님 곁을 떠나는 부자청년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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