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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04-22 조회수 : 152

부활을 만나는 사람: 죄 문제로 참사랑을 갈망할 줄 아는 사람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의 기쁨이 가득한 팔일 축제 화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보다 먼저 만나는 영광을 누린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납니다.
그녀는 왜 이 특별한 은총을 받았을까요? 무엇이 그녀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여인입니다.
(루카 8,2; 마르 16,9 참조)
일곱 마귀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온 존재가 악의 세력 아래 고통받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두컴컴한 감옥에 갇혀 빛 한 줄기 없이 절망 속에 살아가는 죄수의 심정을 말입니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그 감옥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오직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열어주고 그를 끌어내 주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써 그녀는 끔찍한 죄와 악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참된 생명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죄에서 멀어지고 참된 생명을 누리는 유일한 길임을 그녀는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 안에 있던 ‘착한 뜻’입니다. 
 
죄가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기에,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체험했기에, 그분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 착한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가리옷 유다입니다.
그 역시 예수님과 3년이나 함께 먹고 자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왜일까요? 그에게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었던
‘진리를 찾는 마음’, 그 ‘착한 뜻’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다른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돈과 세상의 명예,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거짓된 믿음을 그는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목마른 나그네에게 시원한 오아시스처럼 보이지만, 다가가면 갈증을 해소시켜 줄 물은 온데간데없고 뜨거운 모래뿐인 허상처럼, 세상의 부와 명예는 참된 행복을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우리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헛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들이 우리를 얽매는 고통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가르치셨고, 당신 친히 가난하고 겸손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셨으며,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갈 힘과 은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서, 그분의 진리 앞에서 우리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던 세상의 가치들은 마치 가을 들판의 마른 지푸라기처럼 힘없이 스러져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예수님,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던 그분을 잃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시고 이제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녀에게 죄에서 멀어지게 하고 참된 생명의 기쁨을 주었던 유일한 사랑의 근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제 누가 그녀를 악의 세력에서 지켜주고, 누가 그녀에게 참된 평화와 자유를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그녀는 다른 제자들이 다 떠나간 빈 무덤 가에 홀로 남아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찾아 그 곁에 머물고 싶었던, 그 간절한 사랑과 착한 뜻이 그녀를 그곳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구빈원이라는 차갑고 비정한 세상에 던져진 소년 올리버의 이야기입니다.
올리버가 처한 현실은 그 자체로 혹독한 시련이자, 그를 끊임없이 죄와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는 힘이 작용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악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구빈원과 장의사 집에서의 학대를 피해 런던으로 도망쳐왔지만, 보호자 없이 홀로 남겨진 그는
자연스럽게 페이긴이 이끄는 소매치기 소굴(죄의 환경)에 머물게 됩니다.
올리버는 본성이 선했지만, 악한 환경의 힘은 강했고, 그곳에 머무는 한 원치 않는 범죄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시 자신이 소매치기하려던 친절한 브라운로 씨를 만나 선한 환경의 따스함을 맛보지만, 그곳에 굳건히 '함께 머물' 힘이 없었기에 페이긴 일당에게 쉽게 다시 끌려가 악의 소굴로 돌아옵니다.
이는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머물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지가 있어도 결국 죄의 환경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강도질에 동원되었다 총에 맞고 메일리 부인과 로즈 양의 보살핌을 받게 되면서, 올리버는 진정한 사랑과 안전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환경이야말로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임을 깨닫고, 그들과 '함께 머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는 이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임을 직감합니다. 
 
결국 올리버가 사랑 안에 머물기로 선택하고 노력했기에, 그는 페이긴과 악당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브라운로 씨에게 입양되어 진정한 안식과 구원을 얻습니다.
올리버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머묾'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 머묾이 없다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죄와 고통의 환경에 머무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예화는 ‘피노키오’가 죄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기 위해 제페토 아버지를 찾는 과정이나, ‘엄마 찾아 삼만리’를 가는 아이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용서를 체험하고 그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쁨을 맛보았다면,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분을 찾지 않을 수 없고 그분과 함께 머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의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우리가 그 죄에 완전히 속박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은 오직 그분과의 머묾을 통해서입니다.
그분 곁에 머물 때, 그분의 사랑은 우리 존재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죄보다 더 큰 존재라는 믿음을 심어줍니다. 
 
이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고 따스한 사랑을 느끼며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 안에서 자신이 안전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생명의 양식을 얻습니다.
아기는 엄마 품을 떠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영은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다만 거짓말은 이 그리워하는 영의 울림의 입을 막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오직 창조자만이 자신을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음을 본성적으로 압니다.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처럼 창조자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 양식을 찾고 머뭅시다.
그러면 천사도 만나고 반드시 그리스도께서도 만나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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