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28,8-15
예수님은 우리가 가는 길로 마주 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천사를 보고 두려워하면서도 기뻐하며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여인들에게 ‘마주 오시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평안하냐?”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마주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인들의 길을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그분께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사들을 보았던 경비병들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라는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기뻐 복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부류는 아직 기회가 있는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로 가기만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기회가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뵈올 기회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그렇다면 ‘갈릴래아’란 장소로의 이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단순한 지리적인 장소의 이동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바로 여인들의 상태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두려워서 감히 그분께 다가올 생각도 못하고 미심쩍어하였고 두려워하였습니다.
반면 여인들은 이미 천사들의 가르침으로 예수님을 보고는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예수님을 만나면 두려워 도망을 칠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사해와는 다르게 물을 받아들이면 다시 내보내어 흐르는 호수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가득합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부활에 대해 확신하며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이들이었습니다.
이 수준이 되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실까요?
왜냐하면 부활 체험은 하나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로 합당한 이들에게 보상을 주십니다.
아무에게나 나타나신다면, 잘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상을 주시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상태를 긍정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는 현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많은 분들이 보셨을 영화 ‘기생충’입니다.
이 영화에서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은 부유한 박 사장 집에 차례로 위장 취업합니다.
처음에는 아들 기우가 명문대생으로 속여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딸 기정은 미술 치료사로, 아버지 기택은 운전기사로, 어머니 충숙은 가사도우미로 자리를 잡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 사장 가족은 의심 없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일자리를 제공합니다.
박 사장 가족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사람에 대한 깊은 경계심이나 분별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택 가족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나름의 '호의'와 '보상'(일자리와 신뢰)을 베풉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기택 가족은 이 '쉽게 얻은 상' 앞에서 감사하고 성실해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대담하게 거짓을 꾸미고 박 사장 가족을 기만하며 그들의 공간을 잠식해 들어갑니다.
박 사장 가족의 무분별한 신뢰와 호의는 기택 가족의 양심을 일깨우기보다는, 그들의 탐욕과 기생적인 본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겉으로 보이던 평화는 깨지고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선한 의도였을지 모르는 '상'이,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주어졌을 때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은 비단 현대 사회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 왕과 그의 아들 압살롬의 관계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누이를 욕보인 이복형 암논을
살해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다윗 왕은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를 용서하고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진심으로 회개하기는커녕, 아버지의 관용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세력을 키워 반역을 일으킵니다.
다윗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성급하고 무분별한 '용서'와 '복권'이라는 상은, 압살롬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죄악과 비극(반역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 되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영혼에게 주어진 과분한 '상'은 때로 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사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상태가 ‘갈릴래아’와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다윗의 삶은 이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처음 그는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이 일에 충실하기 위해 배운 돌팔매질은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조금씩 믿음을 성장시켜서 사울의 부하로 있으면서도 충실하여 결국 왕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러나 밧세바와 죄를 지으며 그는 다시 하느님의 총애를 잃습니다.
예언자 나탄을 시켜 하느님은 그의 잘못을 책망하시고 갓 태어난 아들이 죽는 비극, 아들에게 쫓겨나고 쫓기는 비극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습니다.
이런 죄의 상태에서 바로 용서가 주어졌다면 그는 하느님께 기생충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갈릴래아란 받아들이는 은총에 대한 효과가 발생하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 만큼 성실히 살며 복음을 전하려는 착한 뜻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하.사.시.를 읽고도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했다면, 신학교에서 성체를 영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은총은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요행을 바라지 말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싶다면, 열심히 믿음을 키워가고 그 믿음을 전하는 연습을 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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