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체를 영해도 힘이 생기지 않을까?
오늘은 주님 만찬 성 목요일입니다.
성체성사와 이를 위한 사제직이 세워진 거룩하고 복된 날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바치셔야 하는 수난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성찬례가 발을 씻어주는 일과 같음을 보여줍니다.
부모가 당신 살과 피를 자녀에게 먹고 마시게 하는 것은 또한 부모가 마치 종처럼 자녀의 생존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예식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리옷 유다와 같습니다.
그는 성체를 영했어도 바로 예수님을 배신하러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안 그럴까요? 베드로는 이 예식을 거부하지만,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 이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나중”은 언제일까요? 베드로가 회개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언제 온전한 회개가 일어났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명확히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일 것입니다.
그 순간이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 뵐 때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좀 더 알게 되어야 성체성사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기는 하였지만, 죽어도 부활하실 분까지는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시기 위해 성경을 설명해 주신 것처럼
그분을 알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뿐입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우리가 매번 성체를 영 할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주인공 ‘혜원’은 도시 생활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부엌에서 만들어 주던 음식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엄마는 집을 비운 상태라 집에는 혜원 혼자 남습니다.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가며 거친 들판 속에 혼자 서 있을 때, 혜원은 문득 엄마가 오랫동안 가꾸어
온 텃밭이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잡초만 무성해 보이던 밭을 조금씩 고쳐 나가며, 엄마가 남긴 수첩 안의 레시피를 따라 몇 가지 음식을 만들어 봅니다.
도시에서 빠듯하게 일했던 시절에는 겨우 끼니를 때우듯 밥을 먹었지만, 시골집에 돌아와서
하나하나 과정을 거쳐 직접 요리를 하게 되자 오래전 엄마가 주방에서 땀 흘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릴 때 혜원은 엄마가 만들어 주던 음식이 맛있기는 했지만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고,
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준비 없이 텃밭을 돌보려 하니 한 번에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물 주는 시기와 양부터 비료의 종류, 햇빛의 세기까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습니다.
엄마가 이 텃밭을 얼마나 정성스레 가꾸었는지 느낄수록, 혜원은 엄마가 남긴 레시피대로 음식을 차릴 때마다 단순한 한 끼 식사를 넘어 삶을 보듬는 느낌을 받습니다.
묵은 재료를 버리듯 상처나 슬픔을 털어내고, 새로운 씨앗을 심듯 내일을 기대하게 됩니다.
차차 계절이 바뀌며 농사가 무르익어 가듯, 혜원은 땅을 일구는 과정에서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혼자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엄마가 왜 이런 음식을 만들어 주었을까?”라는 물음이 자주 떠오르고, 그럴 때마다 혜원은 수첩 속 레시피를 꺼내 하나씩 시도해 봅니다.
양이 조금 달라도, 재료가 달라도, 정성스럽게
밭에서 얻은 재료로 요리를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엄마 손맛이 떠오릅니다.
그 맛은 순간적인 허기를 달래 주는 것이 아니라, 혜원이 지쳐 있던 도시 생활에서 맛보지 못했던
평안과 위로를 줍니다.
그렇게 혜원은 하루하루 밭에서 수확한 재료를 손질하고, 뜨거운 불 앞에 서서 엄마의 흔적을 되새깁니다.
시간이 지나며 엄마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도 희미해지고, 오히려 엄마가 가르쳐 준 요리들이
혜원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어느덧 텃밭은 채소와 과일로 풍성해지고, 그 재료들로 만들었던 음식은 혜원에게 마음을 치유하는 양식이 됩니다.
혜원은 이 과정을 통해 엄마가 전하려던 것이 단순히 “맛있는 한 끼”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가꾸고 마음을 채워 가는 방법이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결국 혜원은 엄마가 남긴 레시피와 텃밭을 통해 머물 곳을 찾고, 내면의 허기까지 달래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며, 도시에서 쌓인 상처도 서서히 아물어 갑니다.
혜원은 다시 도시로 나가 이전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1년 정도 지나니 다시 허기가 집니다.
그래서 돌아옵니다.
이전처럼 텅 빈 집이지만,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음식을 하고 텃밭을 가꾸면 다시 힘이 생길 것을 압니다.
그렇게 다시 엄마는 보이지 않지만, 엄마의 작은 숲에서 힘을 회복해갑니다.
양식은 음식과 다릅니다.
그 양식을 주던 이의 희생이 서려 있습니다.
그 희생을 알려는 노력이 더해질수록, 그분을 더 알아갈수록 음식은 양식이 되어갑니다.
음식은 몸만 채우지만, 양식은 영혼을 채웁니다.
제가 어머니가 가져다주신 단팥빵과 흰 우유의 맛을 어떻게 천상의 맛으로 느낄 수 있었을까요?
그동안 어머니를 알려고 하는 작업이 곁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보입니다.
김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돌무더기만 있는 곳에 가서 감동하려면 알고 가야 합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는 노력 없이 왔다가는 그냥 밀가루일 뿐입니다.
성체를 영해도 발전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알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지 않기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도 성체성사를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어주신 사랑을 대신 넣은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 전에 말씀의 전례가 있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성체성사는 항상 ‘나중’에 더 느끼게 될 그런 성체성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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