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8,31-42
진리가 무엇인지 몰라서 힘든 거다!
영화 『레터스 투 갓』는 소아암에 걸린 소년 타일러와, 우울증에 빠져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던 우체부 브래디의 만남을 통해 “나는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라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타일러는 매일같이 “하느님,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오늘은 제 친구 샘의 고민을 해결해주시고, 우리 엄마가 힘낼 수 있도록 친구를 보내주세요.”라는 식의 편지를 씁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우체부 브래디. 처음 이 편지를 발견한 브래디는 ‘이게 대체 뭔가?’ 하는 의아함에 열어보지만, 점차 편지의 진정성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에 이끌립니다.
브래디는 이혼하여 아들도 볼 수 없는 상태여서 “난 아무것도 해낼 수 없어. 내 인생은 엉망이야.”
라고 자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타일러의 편지에는 언제나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요.
저도 언젠간 낫게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라는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접한 브래디는 ‘혹시 내가 이 아이의 기도에 작게나마 응답할 수 있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타일러의 병세는 조금씩 악화하여 가지만, 그는 여전히 웃으며 “브래디 아저씨,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대요. 아저씨도 들을 수 있지 않으세요?” 라고 말합니다.
처음엔 이 말이 부담스럽기만 하던 브래디는, 어느 순간 “이렇게 작고 힘없는 소년조차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잖아.
나 또한 누군가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다면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타일러의 어머니 매디는 남편을 잃고, 아들 병원비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며 외롭고 슬퍼하던 터라 브래디의 작은 도움과 격려가 큰 위안이 됩니다.
브래디는 자신이 이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하면서, “내가 너희들에게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꼭 돕고 싶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브래디는 더 이상 술과 자책에 의존하지 않고, 타일러 엄마의 든든한 친구이자
타일러의 ‘아버지 같은’ 조력자로서 성실히 우편물을 배달하고, 가족의 곁을 지킵니다.
결국 타일러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가 쓴 편지들은 브래디와 마을 사람들에게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커다란 깨달음과 희망을 남깁니다.
브래디는 “타일러를 통해 난 진리를 알았어.
나는 누군가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야.
그걸 믿었을 때, 나는 죄와 절망에서 벗어났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새로운 정체성은 곧 ‘나 또한 작은 하느님처럼, 누군가의 기도와 필요에 응답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고, 이 믿음이 브래디를 완전히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전해 주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총이 진리를 통한 자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얽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진리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더는 죄를 짓지 않고 모든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다인들도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엇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6,53)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가 갖게 되는 진리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분과 ‘대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아버지와 대등하게 하신다고 박해받으십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10,33)
예수님께서는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10,34-36)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참으로 죄에서 벗어나집니다. 이것을 믿으려면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요한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것 대신 발을 씻어주시는 행동을 하십니다.
당신이 제자들보다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까지 들어 높이시는 것이 성체성사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3-15)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알돈자는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어머니는 몸을 파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어떻게 숙녀처럼 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알돈자는 돈키호테의 영향으로 그녀가 자신을 죄를 지은 창녀로 여겼던 것에서 벗어나,
결국 자신이 공주 알돈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죄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됩니다.
우리 가치는 마치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그릇들과 같습니다.
그것들이 개밥그릇으로 쓰였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나에 수억 원 짜리 보물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았을 때는 더는 개밥을 담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있는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값을 쳐 주러 오신 분이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면 마치 사이비처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공로로 우리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믿으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결국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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