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5,17-19
하늘에서 정해질 나의 위치: 나는 타인에게 어떤 비전을 주는가?
얼마 전 어떤 모임을 하는데, 한 자매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드릴 예화가 그에 해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주인공 앤디는 갓 대학을 졸업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런웨이라는 유명 패션 잡지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비서로 일하게 됩니다.
미란다 프리슬리는 패션계의 교황이라 불릴 만큼 영향력이 큰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미 미란다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에밀리가 있었습니다. 에밀리는 처음 앤디를 무시하며, 그녀의 부족함을 지적하고는 “그렇게 옷도 못 입고, 여긴 그런 사람을 위한 자리가 아니야”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에밀리는 스스로를 완벽하게 보여주려 애쓰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더욱 경쟁적으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앤디는 점차 일을 배우고 실력을 쌓으며 에밀리와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밀리가 못하는 일들을 해내고, 미란다에게 더 많은 신뢰를 얻기 시작합니다.
에밀리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는 앤디를 경계하며, “너, 나를 밟고 올라서려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그 순간, 앤디는 자신도 모르게 에밀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승진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내는 거예요.”
그런데도 앤디는 미란다에게 점점 더 인정받으며, 더욱 많은 책임을 맡게 됩니다.
윗사람의 눈에는 남을 밟고 올라가 잘 보이려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앤디는 점차 미란다의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왜 내가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하나?” 경쟁적이고 냉정한 미란다의 업무처리 방식에 불편함을 느끼고, 그녀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앤디는 마음을 정하고 미란다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리 악랄한 미란다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에 여전히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경쟁하며 경쟁자를 끌어내리려 하는 부하직원은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제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신자를 만나게 되고 인사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분도 있습니다.
일을 매우 잘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를지 모릅니다.
그 신자가 다른 신자들에게 “그냥, 이 정도만 하면 돼!”라며 그 신자가 사제의 인정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을 느낄 때입니다.
사제는 모든 봉사자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사제가 본당 전체를 생각할 때 그 한 사람만을 좋아하기보다는 전체가 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와 반대로 누군가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예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이와 똑같이 자리가 매겨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높낮이가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내 주위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만약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때 매우 공부를 잘하는 한 친구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난 치과의사가 될 거야. 다른 의사들은 환자가 오면 밤에도 나가야 하지만, 치과의사는 정시 출근, 정시에 퇴근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거든.”
저는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똑똑한 사람이 사회에 어떤 공헌을 하려고 하는지보다는 자기 안위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이에게 이런 생각을 누가 품게 하였을까요?
그런 부모나 선생은 세상에서 기억될 수 없습니다.
반면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의 사례는 참 좋습니다.
만약 설리반 선생이 헬렌 켈러를 완전하게 키워내려 하지 않았다면 지금 설리반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을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자신도 깊은 만족과 성장을 경험하며, 헬렌을 돕는 일이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신앙교육을 하였는지 알면 나의 위치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주일미사만 빠지지 않고 나가라.” “성당 나가는 게 다 너에게 좋은 거야.”라는 식은 나의 위치도 하늘에서 낮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의 얼굴이 되어라.” 등의 완전한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부모라야 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가르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비전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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