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의로움
마태오 복음 5-7장은 흔히 산상설교라는 특별한 이름을 띠고 있으며, 참 행복의 길을 걸어(5,3-12)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권고한 다음(5,13-16), 율법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그 첫 말씀이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의로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인식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의로움은 율법에 대한 성실성을 가리켰으며, 이런 이유로 자신들을 의인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죄인 또는 무법자였으며, 상종을 꺼리던 대상이었습니다. 상종하는 순간, 자신들의 의로움이 오염되고 손상될 수 있다는 조바심, 의로움의 공동체에서 추출될 수 있다는 극도의 염려에서였습니다.
이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은 의로움 판단의 척도로 여겨지던 이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십계명의 제5계가 대상이 되고 있으나, 이어서 다른 계명들도 새 단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계명의 자구에 얽매인 나머지 잊혀온 그 근본정신과 함께, 율법에 대한 성실성 차원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함을 일깨우십니다. 인간의 잘못된 행위가 있고 난 다음,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율법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잘못된 행위의 뿌리가 되는 인간의 마음이 의로울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살인이 결국 불목과 증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하기 위하여 서로 화해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은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바보와 멍청이? 사실 번역에 있어 어려움을 주는 경우 가운데 하나가 욕설을 옮기는 일입니다. 멍청이는 바보보다 강도 높은 욕설이라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고, 멍청이라는 욕설은 유다인 세계에서 하느님도 모르는 놈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어 매우 심한 욕설로 취급되었던 것 같습니다.
표현이 어떠하든, 살인의 뿌리가 되는 요소를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올리는 예물조차도 이러한 화해의 마음이 없다면 가치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율법에 대한 성실성이라는 차원의 의로움을 뛰어넘어야, 곧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나아가 욕설을 퍼 붙는 못난 모습을 벗어나 그 근본정신에 성실해야, 비로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생활을 시작하던 초기, 수원 지동 본당에서 보좌로 일하고 있었을 때, 수요일마다 관할 구역에 위치한 수원교도소를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교리를 가르치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인들을 만나 면담하면서,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들 자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사회가 이들을 범법자로 만들었구나 하는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일면식도 없는 타인 상해 또는 살해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더욱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일상화된 우리의 무관심, 그냥 내던진 차가운 말 한마디, 나아가 무시와 경멸의 몸짓 등, 이러한 우리의 모습들이 그들의 마음을 피폐화시켰고 결국 큰 잘못을 저질러 영어의 몸이 되게 했다는 판단에서입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따뜻한 말과 존경의 몸짓으로 다가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맑고 밝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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