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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0일 _ 김건태 루카 신부

작성자 : 김건태 작성일 : 2025-03-09 조회수 : 142

심판의 잣대는 사랑 실천

 

 

오늘 복음 말씀 앞에 서면, 미켈란젤로 불후의 걸작 최후의 심판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적 천상에 들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착하게 행동해야 되겠다 다짐을 하면서도, 잘못하면 지하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켈란젤로가 작품 활동을 하던 16세기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랬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마태오 복음 25-25장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마태 24,3)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베푸는 사랑이 바로 심판의 척도가 될 것임을 강조하면서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하시며, 이웃 사랑을 강조하시면서 심판의 참된 일자를 밝혀주시는 듯합니다.

처음으로 만나 뵙게 되리라 믿고 있는 이 심판관을, 인간은 오래전부터,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상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이웃 앞에 서 있을 때마다 심판관 앞에 서 있는 것이며, 심판은 바로 이 순간부터 결정되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러니 어떤 심판이라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님으로 알아 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나가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 (이렇게 표현해도 될까요?) 한 그루의 사랑 나무를 심고 가꾸는 삶이면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이 하느님께서 쥐고 계신 잣대가 분명하니만큼, 사랑 실천에만 매진하면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유다인 세계의 유머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비롭지만 계산만은 분명한 대감댁에서 일하던 일꾼에게 친구가 셋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마음속 깊이 두고 있는 친구로서,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친구였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많은 시간 함께 하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친구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귀찮게 여기는 친구로서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 우정을 겨우 유지해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감마님이 계산할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 일꾼을 호출했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두려운 존재였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하다가 세 명의 친구에게 동행을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에게 사정을 말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친구를 찾아가니, 그는 대감댁 문 앞까지만 함께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실망한 이 일꾼은 하는 수 없이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늘 귀찮게 여기던 이 친구는 동행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대감마님 앞에서 필요하면 증언도 아끼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짐작들 하셨겠지만, 언젠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서게 될 우리에게 첫 번째 친구는 재물, 두 번째 친구는 가족, 세 번째 친구는 사랑 실천입니다. 재물은 한 발짝도, 가족은 무덤까지만, 사랑 실천만이 하느님 앞에서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해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내가 바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임이 전제됩니다. 가장 작은 나를 이처럼 살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도 당연히 우리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향하고 살피고 도와주는 사순시기 첫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것이 십자가라면 더욱 고맙고 신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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