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복음: 루카 6,27-38: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7-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향해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저주하였는지 모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또 다른 순교라고 할수 있는 원수 사랑은 그냥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원수 사랑이라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십자가와 묵주를 쥐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 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와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위대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휘광이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실은 영예로운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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