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사도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을 기념합니다, 한 사람의 회심을 축일로 지낸다는 사실 자체가 회심 사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벤야민 지파 출신 유다인으로서(필리 3,5), 기원후 5-10년경 (현 튀르키예의) 킬리키아 지방 중심도시인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타르수스는 로마제국의 번창했던 도시로서 유다인들이 다수 거주했으며, 그들 가운데는 바오로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바오로는 교육열이 높았던 타르수스에서 이미 충실하게 유다인 교육을 받았고, 율법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 시대라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권에 놓여 있었던 터라, 바오로는 그리스어 실력이 완벽했으며, 수사학적 기법 활용, 그리스어 성경 및 저서 인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유다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그리스어가 능통했으니, 그야말로 그리스 문화권의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모든 자격을 두루 갖춘 인재였습니다.
주님은 오늘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물음으로 바오로를 회심의 길로 이끌어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십니다. 바오로와 함께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티나와 인근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상 방방곡곡으로, 우선은 튀르키예와 그리스로, 끝내는 법정에 서기 위해 수인(囚人)의 몸으로 당도한 로마로 전파되어 나갑니다.
바오로 사도의 1차(45-49년), 2차(50-52년), 3차(53-58년) 선교여행은 정말 경이로운 여정이었습니다.
튀르키예와 그리스로 성지순례를 떠날 때마다, 바오로 사도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하여 이동한 거리가 거의 15,000km에 이른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선교 성과의 기쁨보다는 반대와 박해, 굶주림과 투옥이라는 현실이 선교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던 그 열정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감탄할 뿐입니다.
한 곳에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여 신자들을 확보하게 되면, 원로에게 그 공동체를 맡기고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또 교회를 세우고, 또 세우고, 그러다가 앞서 세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하면 인편으로 위로와 격려 또는 질책의 편지를 써 보내기를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지역 공동체는 편지를 돌려가며 읽으며, 힘과 용기를 내거나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공동체의 일치와 발전을 거듭해 나갔습니다.
사도가 편지를 보낼 때마다, 지역 공동체는 당연히 그 편지를 모아놓기 시작했으으며, 물론 사라져 기록으로만 남은 것도 있지만, 훗날 이 편지들이 (로마서, 코린토 1-2서, 갈라티아서, 에페소서, 필리피서, 콜로새서, 테살로니카 1-2서, 티모테오 1-2서, 티토서, 필레몬서 등) 13통의 서간으로 묶여,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기적과 같은 일, 아니 기적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바오로를 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미하며, 회심으로 주님 찬미와 선교의 길을 열정적으로 걸어갔던 사도 바오로를 기립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데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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