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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

작성자 : 홍보실 등록일 : 2023-11-03 09:21:57 조회수 : 340

외래에서 저는 치매 노인 환자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 전 60대 초반 여자 환자가 자주 잊어버리는 증상으로 내원하셨습니다. 건망증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는데, 뇌 자기공명영상검사, 아밀로이드 양전자방출단층촬영, 신경심리평가 등을 통해 알츠하이머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본당 구역장으로 활동하실 만큼 외향적인 성격의 이 환자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우울해하시며, 약을 처방 받으러 오실 때마다 눈물짓곤 하셨습니다. 치매를 알리는 과정도 암을 알리는 과정처럼, 의사로서 마음이 힘듭니다. 노인들에게 있어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죽는 것만큼 큰 두려움이자 힘든 과정임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이렇듯 모두에게 소중합니다. 모든 환자가 누군가의 부모, 형제, 자녀, 친구로서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주변인들과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억이란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를 정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억의 상실이 노인들께 큰 공포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감정이 깃든 기억은 더 강렬히 뇌에 남는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수천 년에 걸쳐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사랑이라는 큰 감정 속에서 그분의 말씀이 공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랑이 깃든 기억의 힘을 진료 현장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치매 환자인 아내를 산책을 시키며 살뜰히 돌보고 계신 할아버지부터, 요양원에 모신 치매 아버지 생각에 늘 가슴 아파하며 어머니와 함께 외래에 오셔서 상담받으시고 세세한 부분까지 놓칠세라 가슴 졸이는 아들 보호자까지, 이 모든 것은 환자가 기억을 잃기 전에 베풀었던 사랑 때문이겠지요.

 

미국 식약처 허가를 받은 레케네맙이라는 새로운 기전의 치매 치료제가 국내에도 곧 도입될 것 같습니다. 치매를 완치하고 정복하는 치료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치매 환자에게 더 다양한 치료 방법을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의사로서 설렙니다. 그리고 단순히 치매라는 모호한 개념에서 치매를 여러 가지 생체표지자로 정의하고 병기를 결정하는 등 그 진단기준에도 획기적인 변화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치매를 정복하는 날이 오겠지요.

 

환자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가지만, 가족들의 기억은 그대로 보존되고 또 살아 있습니다. 환자를 닮은 딸, 아들, 손자, 손녀들이 자신들이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지요.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의 기억을, 그분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가족, 주변에게 전달하는 것은 어떨까요?


글ㅣ엄유현 레비나(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