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 삶에서 흔히 경험하는 고통과 악(惡)의 문제는 인간에게 쉽게 풀리지 않는 근원적 문제입니다. 고통과 악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더 예민하고 난해한 문제는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고통 또는 납득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삶을 사는 사람이 고통스럽고 힘든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쁜 짓과 편법을 일삼는 사람이 성공하고 잘 사는 상황이 현실 삶에 흔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을 원망하고 의심하기 쉽습니다. “정의로운 하느님이 왜 이런 불의한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정말 하느님은 정의의 편이신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 그리스도교 신학과 종교철학의 핵심 주제로 논의되었습니다. 신정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의 논의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신(神) 입장에서의 변론’(절대적이고 완전한 신에 의해 창조된 세상에 불의한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것은 신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변론)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과 악에 대한 본질적 분석’(고통과 악은 왜 존재하는지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신정론에서 제시되는 내용은 그 주제의 특성상 복잡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뜻을 이해하고 고통과 악의 원인을 현실적으로 납득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신정론 이해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율곡 이이(李珥)의 설명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유교에 신정론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정론이 시작되는 딜레마를 유교도 똑같이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교에서도 만물의 궁극 원리인 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삶을 살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천인감응天人感應)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원리에 어긋나는 모순된 상황이 존재합니다. 율곡은 『천도인사책(天道人事策)』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습니다.
율곡에게도 천인감응은 기본 원리입니다. ‘하늘은 사사로움 없이 오로지 덕이 있는 사람을 돕기 때문에 덕을 따르는 사람은 길하고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흉하는 것이 천인감응의 이치’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천인감응의 이치가 그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상황에 주목합니다. “사람이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는데 하늘이 순리대로 도와주지 않고,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데 하늘이 오히려 도와주기도 하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가 율곡의 문제의식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율곡의 해명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천리에 순응한 자가 망하기도 하고 천리를 거스른 자가 흥하기도 하는 것은 천리와 상관없다.” 율곡은 사람의 현실 상황과 하늘의 이치가 순응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천인감응의 원리에 손상이 가는 것은 아님을 강조합니다. 하늘의 이치(理)는 세상 만물이 마땅히 나가야 할 방향과 원리를 제시해주는 불변의 진리이지만, 그렇다고 현실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이 모두 하늘의 이치에 의한 작용은 아닙니다. 현실 세상의 여러 변화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기(氣)의 작용입니다. 현실 세상의 시시콜콜한 여러 변화가 모두 하늘의 이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 세상의 여러 상황은 그저 그때마다 이루어지는 물리적 변화 현상일 뿐입니다.
둘째, “현세 일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때와 형세에 따라 결정된다.” 현세적 일에 직접 작용하는 것은 기(氣)이고, 기의 작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개념이 때와 형세입니다. 기의 작용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때와 형세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때와 형세는 정확히 규정하거나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우연적이고 순환적인 흐름 같은 것입니다. 때와 형세가 맞지 않으면 천리에 순응하더라도 현세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와 형세가 맞으면 천리에 거스르더라도 일이 이루어집니다. 현세 일의 결과적인 성패가 그 일의 정당성이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설명은 신정론, 특히 악에 대한 본질적 분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에게 악 혹은 현실의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수용 가능한 설명을 제시해줍니다. 사실 고통과 악의 문제를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해 근본 원인을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악의 근본 원인을 파악한다고 현실 악이 적절히 제거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지나치게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악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대처는 역설적으로 원인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고통과 악의 현실이 때와 형세에 따라 그저 그렇게 주어지는 변화의 흐름인 것으로 이해할 때 지나친 심각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고통과 악이 마치 날씨에 따라 눈비가 내리는 것 같은 변화의 흐름일 뿐이라 이해할 때 수용하고 감당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셋째, “진실로 덕을 닦으면 천하가 따를 것이다.” 율곡의 신정론은 인간에게 고통과 악의 현실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율곡의 신정론이 단지 소극적인 수용의 자세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곡은 고통과 악의 현실을 그대로 관조하면서도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강조합니다. 천리에 순응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때와 형세에 의해 어긋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리에 순응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무의미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와 형세는 우연적이고 순환적입니다. 비록 지금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때와 형세일지라도 언젠가는 일이 이루어지는 때와 형세가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때와 형세가 언제 올지 모르니 언제나 천리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율곡의 신정론은 현세 삶의 고통과 악 자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율곡이 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도 하늘의 이치에 따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이치는 언제나 변함없는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인간은 하늘의 이치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현세 삶의 고통과 악은 단지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변화이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저 받아들이면서 흔들림 없이 하늘의 이치에 부합하는 삶을 살 뿐입니다. 이것이 적합한 신앙인의 삶이지 않을까요?
글ㅣ오지섭 사도요한(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