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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니콜라오 5세의 희년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4-11 09:25:10 조회수 : 77

‘르네상스 교황’은 1440년대부터 1520년대에 이르는 르네상스 시대에 문화예술을 옹호했던 10명의 교황을 말합니다. 첫 번째 르네상스 교황인 니콜라오 5세의 재위 기간은 예술과 학문에 있어 비할 데 없는 중요한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와 그리스도교 세계가 오랜만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바젤 공의회(1431–1449년)의 대립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로 다시금 이교를 종식하고 교회의 일치를 회복할 수 있게 된 니콜라오 5세 교황은 이에 대한 감사로 1450년을 희년으로 선포했습니다. 1449년 1월 19일자로 작성된 교황 칙서 “Immensa et innumerabilia”에서 교황은 “무한하고 셀 수 없는” 하느님 자비의 선물 가운데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매고 푸는 권한’을 주셨다는 점과,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특정한 시기를 정하여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의 샘이 더욱 풍성히 흘러넘치도록 마련하였다는 점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전임 클레멘스 6세 교황이 정한 50년 희년 주기를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이 희년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5월 24일에 시에나의 위대한 성인 베르나르디노(Bernardino)의 시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당시의 목격자들과 기록자들은 이때에 세계 각지에서 로마로 향하는 순례자의 수가 엄청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하루에 약 4만 명의 순례자가 로마로 몰려들었고, 가을에도 많은 순례자가 찾아왔지만 여름에는 흑사병이 다시 극심하게 퍼지면서 순례자의 수가 크게 감소하였습니다. 당시 흑사병을 몹시 두려워했던 교황은 파브리아노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희년에 비극적인 사건들도 발생했는데, 12월 19일 엄청난 인파의 순례자들이 성 안젤로 다리의 계단 난간으로 한꺼번에 몰려든 결과, 일부 노새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엄청난 혼잡이 일어나 172명이 강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희년에 “거의 무한한 양의 은화”가 교황청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신자들의 헌금뿐만 아니라, 희년에 맞춰 엄청난 양으로 유입된 식료품들에 부과된 높은 관세와 세금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수입으로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바티칸 도서관의 실질적 설립자로서 사본 수집과 필사본 제작에 거금을 투자했고, 르네상스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으며, 로마의 수많은 성당, 궁전 그리고 다리를 재건축했습니다. 

1450년 희년을 기념하는 금화도 발행되었는데, 교황 문장과 함께 “N. PP. V. Anno Ivbilei. 교황 니콜라오 5세, 희년”, 그리고 로마의 대표적 사도 성인들과 함께 “Alma Roma, S. Petrvs, S. Paulvs, 곧 거룩한 로마, 성 베드로, 성 바오로”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열쇠를, 바오로 사도는 순교를 상징하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