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25,9)에서는 오십 년마다 희년이 돌아오면 뿔 나팔을 불어 이를 신호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이때 불어야 할 나팔은 숫양의 뿔로 보입니다. 희년을 뜻하는 히브리어 [요벨]이 ‘숫양’의 의미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뿔 나팔은 예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신호였습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 집결해 있을 때 주님께서 뿔 나팔 소리와 함께 불 속에서 현현하십니다(탈출 19,16-20). 이때 뿔 나팔을 분 건, 그것이 천둥 같은 주님의 음성(욥 26,14; 에제 1,24 등)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묵시 4,1).
뿔 나팔이 주님 현존의 상징이 된 데는 성경에서는 뿔이 힘의 상징, 특히 하느님께서 지니신 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사무엘기 하권 22장 3절에서 다윗은 “저의 하느님, … 제 구원의 뿔, … 저를 구원하시는 분.”이라며 하느님을 구원의 뿔에 빗대며 그분의 권능을 찬양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옛 민족들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하여, 우상의 머리에 뿔을 장식하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신의 힘을 뿔 달린 짐승의 힘에 빗대려 한 것입니다(민수 23,22 참조).
뿔이 힘의 상징, 특히 하느님이 지니신 힘의 상징임은, 우발적인 살인으로 보복 살해의 위험에 빠진 이들이 ‘제단의 뿔’로 피신해 하느님의 용서와 보호를 바랄 수 있었던 옛 관습(1열왕 1,50; 2,28 참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중개지 구실을 해 온 제단(1열왕 8,30-32 참조)은 성막.성전에서 지성소만큼은 아니지만 “가장 거룩한 것”으로써(탈출 29,37) 전례의 중심이었습니다. 백성은 제단에서 제물을 바쳐 속죄하고(레위 4,13-21 등), 하느님은 그곳에서 당신의 존재를 백성에게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레위 9,23-24; 1열왕 18,38 등).
이런 제단에서 하느님의 힘과 자비를 가장 잘 드러내 준 부분이 네 귀퉁이에 달린 뿔(탈출 27,2)입니다. 아모스서 3장 14절에서는 뿔을 자르면 제단 전체가 파괴되는 것으로 암시하는데요, 그만큼 뿔은 제단의 필수 요소이자 하느님의 힘과 신성이 깃든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백성은 뿔을 잡으면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상징성을 반영하듯, 뿔로 만든 나팔도 희년 율법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신호하는 도구로 등장하게 된 듯합니다.
희년은 빈곤 탓에 가산을 팔고 자신까지 판 백성이 자유를 되찾고 재산도 환원받을 수 있는 해입니다. 이런 해방의 해에 뿔 나팔을 붊으로써 주님의 현존에 대해 환기한 뒤 토지의 소유권을 원위치시켜, 땅의 원주인이자 백성의 구원자는 하느님이심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9)에서 “힘센 구원자”가 ‘구원의 뿔’로 직역되는 표현임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