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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성지의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축일 9월 20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5-03-21 13:36:26 조회수 : 61

최경환이 경기 고양에 있던 땅을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빚 때문에 심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최경환은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빚진 사람에게 주고 그들을 화해시켰습니다. 최경환은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었고, 시장에 가서는 좋지 못한 물건들만 골라 샀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좋지 않은 물건을 사주지 않으면 이 불쌍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최경환은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했습니다.

최경환(1805~1839)은 충청도 홍성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먼저 입교한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결혼 후에 서울로 올라왔으나 외인들과의 재판에 휘말려 가산을 잃고는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강원도 금성에서 살다가 인천 부평으로 이사했고, 마지막으로 안양 수리산에 정착했습니다. 교우촌 회장이 되어 교우들을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가 순교했을 때 최경환은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했고, 그들의 남은 가족을 잘 보살폈습니다. 교우들은 진심으로 최경환을 존경했습니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포졸들이 내려와 최경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최경환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째서 이렇게 늦었소? 기다리고 있었소. 지금은 밤이니 좀 쉬고 요기라도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포졸들은 그 말을 믿고 잠을 잤습니다. 그 사이 최경환은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이번 박해는 천주교 씨를 말리는 것이니 우리 다 같이 순교합시다.”라고 설득했습니다. 가족에게도 “여기 있으면 굶어 죽는다. 그렇게 죽느니 감옥에서 죽자. 그러면 훌륭한 순교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최경환과 마흔 명의 교우는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 재판장이 신문했습니다. “너는 천주교를 혼자 믿지 왜 다른 사람까지 믿게 했느냐?” 이에 최경환이 “천주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면 지옥에 가오. 나는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최경환이 배교를 거부하자 형리는 주리를 틀고 꼬챙이로 살을 깊게 찔렀습니다. 피가 솟구쳤으나 최경환은 고통스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리는 함께 붙잡아온 교우들을 불러내 곤장을 열 대씩 쳤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견디지 못해 배교했습니다. 최경환은 이를 보고 슬퍼했습니다. 재판장은 큰아들 최양업을 중국으로 신학 공부하러 보낸 죄를 추가해 최경환을 더욱 혹독히 고문했습니다. 그는 두 달 동안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포도청에서 순교했습니다.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이 잘리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최경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