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길(1791~1839)은 대대로 벼슬을 지내온 중인(양반과 상민 계급의 중간)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진길은 조선 최고의 통역관인 당상역관(堂上譯官/正三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뜻이 깊어 많은 책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만 권의 책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는 불교와 도교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진길은 우연히 장롱을 열었다가 그 안을 바른 종이에서 ‘각혼(覺魂), 생혼(生魂), 영혼(靈魂)’이란 글자를 보았습니다. 탐구심이 강했던 유진길은 그 의미가 궁금했습니다. 알아보니 그 글자는 ‘천주실의’라는 책에 들어 있는데 ‘생혼’은 식물의 혼, ‘각혼’은 동물의 혼, ‘영혼’은 인간의 혼을 뜻했습니다. ‘천주실의’는 이탈리아의 마테오리치 신부가 중국 선교를 위해 가톨릭 교리를 알기 쉽게 풀이한 책입니다. 유진길에게 홍 암브로시오라는 교인이 천주교 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유진길은 천주교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유진길에게 조선 교회를 위해 일할 ‘거룩한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유진길은 역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습니다. 유진길은 동지사(冬至使, 매해 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 간 북경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총 여덟 번이나 북경을 오갔습니다. 그리고 정하상과 함께 교황청으로 신부 파견 요청 글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노력으로 조선교구가 설립되었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비롯해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앵베르 주교가 조선에 무사히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이미 유진길이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나 당시 섭정하고 있던 대왕대비의 오라버니와 친한 사이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라버니가 죽자 유진길은 즉시 체포되었고, 온 가족이 달려나와 “배교하라.”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에 유진길은 “나 때문에 가족이 고초를 당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소. 하지만 나는 결코 천주를 배반할 수 없소. 나는 내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소. 나를 본받아 천주교인이 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유진길은 포도청에 여섯 번 출두해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곤장을 맞아 살이 헤어지고 주리로 뼈가 뒤틀렸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 없는 의연한 자세로 모든 고문을 이겨냈습니다. 결국, 유진길은 ‘국법을 어기고 매국노와 공모한 사학(邪學)의 무리’라는 죄목으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