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상(1795~1839)은 순교자 정약종과 유소사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큰형 정철상과 여동생 정정혜도 순교자입니다. 이렇듯 정하상은 순교자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인 경기도 마재마을로 갔습니다. 천주교 신자를 가까이했다가는 화를 당하기 때문에 친척들은 이들을 외면했습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무척이나 춥고 배고팠습니다.
정하상은 스무 살이 되자 조선교회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하교, 함경도 무산으로 귀양 간 교우 조동섬을 한 달이나 걸려 찾아갔습니다. 그는 ‘조선교회에 사제를 모셔 오는 일’이 가장 중요하므로 속히 중국으로 가 사제 파견을 요청하라고 했습니다. 정하상에게 그 말은 뚜렷한 ‘좌표’가 되었습니다. 마침, 동지사 사절단이 중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정하상은 간신히 마부 자리를 얻었고, 한겨울에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도착해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 신부에게 조선 교우들이 쓴 ‘사제 요청 편지’를 전했습니다. 신부는 주교에게 편지를 전할 것이니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정하상은 한양에서 교우인 역관 유진길을 만나 성직자 영입에 힘을 모았습니다. 유진길이 동지사 사절단으로 가게 되자 정하상도 동행했습니다. 북경교회에 도착해 신부를 만났으나 역시 기다리라는 답변뿐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귀국해 로마 교황청에 보낼 ‘사제 파견 청원서’를 작성했습니다. 다시 동지사 사절단에 들어가 북경교회에 청원서를 전달했고, 청원서는 교황청으로 보내졌습니다. 귀국 후, 북경교회에서 사제를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정하상과 교우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사제가 입국하지 못했고 교우들은 매우 실망했습니다. 6년이 흘렀습니다. 북경에서 새로운 소식이 왔습니다. 교황이 청원서를 읽고 감동해 조선교구를 설립하기로 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으며, 신부 두 명도 파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 정하상은 중국인 유방제 신부의 입국을 도왔고 이어 압록강을 건너가 모방 신부를 천신만고 끝에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도 목숨 걸고 모셔왔습니다. 또한,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명의 소년을 마카오신학교로 보낼 때도 길을 안내했습니다. 정하상은 북경을 무려 아홉 번 왕래했고, 의주 변문까지 열한 번 왕복했습니다.
이러한 정하상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희생으로 조선교회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정하상은 체포되었고, 천주교인이라는 죄에 북경교회 내통 죄와 서양인 끌어들인 죄까지 더해져 혹독한 고문을 당해 서소문 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