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예수님의 모습에 머물러 봅니다. 요르단 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 결연함과 기대감이 공존하는 예수님의 두 눈과, 얼음장을 녹이듯 따뜻하게 들리는 하느님의 음성, 그리고 그 음성에 응답하듯 살며시 미소 짓는 예수님의 표정까지….
마치 장성한 아들이 가업을 잇기 위해, 떨리지만 당찬 포부를 가지고 나서는 첫날에, 아버지가 그런 아들을 배웅하며 대견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에도 부자간의 신뢰와 사랑에서 나오는 따스함이 차오릅니다.
죄 없음에도 받으신 주님의 세례는 당신의 뒤를 따라갈 죄 많고 평범한 우리 모두를 위한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고 당신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씀일 것이고, 예수님을 향한 하느님의 따스함 또한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우리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막연하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아버지로서 따뜻하게 불러주셨던 그분을 발견하고 되돌아가는 과정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오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구세주이신 당신의 본분에 따라 아버지의 일을 ‘공적’으로 시작하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이 영광과 장밋빛 미래만이 가득한 길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길 위에는 사람들의 몰이해와 핍박이 있을 것이고, 아끼는 이들의 배신과 십자가까지 자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라보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습은, 허리를 펴고 ‘주님, 저도 당신 뒤를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하고 외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사제품을 받기 전, 성소의 꿈을 키우며 했던 기도가 생각납니다. 주님의 신발이 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로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시어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은 저를 사제로 뽑아주셨는데, 어느새 주님이 서 계셔야 할 자리에 제 생각과 판단이 자리하지는 않았는지, 타성과 게으름에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연중 시기의 시작과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길을 갈망하는 이들을 제자로 들이시고,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시며,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여정을 말입니다. 사제로서의 첫 마음 그대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라 잘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