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의 역사는 보니파시오 8세 교황(재위: 1294~1303년)시대로 소급되지만, 그 뿌리는 교회의 여러 전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126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 봉헌식에서 대주교 디에고 겔미레스는 희년(annus iubilaeus)을 거행했으나, 대사의 일반적 특권은 없었습니다. 이후 1189년 밤베르크교구는 밤베르크의 성 오토 주교(1060~1139년)의 성덕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선종한 지 50년이 되는 해에 대사와 용서의 해를 선포했고, 1220년 캔터베리에서는 성 토마스 베켓(1118~1170)이 순교한 지 50년이 되는 해에 그의 유해 이장을 계기로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대사를 부여했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1300년에 로마에서 첫 교황 선포 희년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레위기 25장 8절에 기반한 ‘100년마다 한 번의 성년’을 선언한 교서 「옛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Antiquorum habet fida relatio)」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 이제 막 지나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 축일로부터 시작된 올해 1300년과 앞으로 100년마다, 경건하게 이 [베드로, 바오로] 대성당들을 방문하는 이들과 진실로 참회하고 고백하는 이들, 또는 앞으로 참회하며 올해와 100년마다 이러한 방법으로 참여할 이들에게 본인은 그들의 모든 죄에 대해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욱 너그럽고 가장 완전한 용서를 허락하며 앞으로도 허락할 것입니다.”
이 희년 선포는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그 해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개활지에서 생활하며 고충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인들과 사도들의 묘지가 있는 대성전을 순례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프랑스 왕 필립 4세와 세속 군주와의 갈등 속에서 교황권을 재확인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순례자들의 유입으로 로마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실질적 필요가 작용했습니다. 1300년 교황의 희년 선포는 교회 안에서 열렬히 환영받았고, 당시 로마 주민 수의 열 배가 넘는 20만 명 이상의 순례자가 로마에 몰려들었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보니파시오 8세는 이 희년의 혜택에서 콜론나 가문을 제외했습니다. 콜론나 가문은 교황의 즉위 정당성을 비판하며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니파시오는 콜론나 가문의 주요 거점인 팔레스트리나를 파괴했고, 이 갈등은 1303년 아냐니(Anagni) 사건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콜론나 가문과 필립 4세의 사주를 받은 군대가 아냐니에 머물던 교황을 공격했으며, 이는 교황권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 이 사건은 교황권이 프랑스 왕실의 영향을 받는 ‘아비뇽 유수’(1309~1377년) 시대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