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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에 맞서 가톨릭교회를 수호한 성 카니시오 (축일 12월 21일)

작성자 : 홍보국 등록일 : 2024-12-13 16:02:25 조회수 : 93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비판한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루터는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며 개혁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결과, 유럽의 많은 가톨릭 신자가 프로테스탄트(개신교)로 개종했습니다. 특히 루터의 고향인 독일에 개종자 수가 무척 많았습니다. 개신교의 급증으로 독일 가톨릭교회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런 때에 카니시오는 독일 전역을 다니며 설교와 강의로 교회를 다시 살리려 애썼습니다. 지금 독일에 가톨릭 신자가 많은 것은 모두 카니시오의 노력 덕분입니다. 카니시오는 쓰러져가던 유럽 가톨릭교회를 재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카니시오(1521~1597)는 네덜란드의 부유한 귀족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열다섯 살에 입학한 독일 쾰른대학 법학과에서 훌륭한 교수를 만났고, 그것은 신앙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했는데,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만든 예수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마침, 쾰른에는 로욜라의 제자인 베드로 파브르 신부가 와 있었고, 그에게 예수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후 카니시오는 30일 동안 피정하고,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당시 예수회는 개신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가톨릭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카니시오는 개신교가 왕성하게 활동하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가톨릭을 부흥시켰고, 가톨릭 교부(敎父)들의 저서를 쉽게 풀이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독일 황제가 쾰른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카니시오는 황제를 만나 쾰른교구가 존폐 위기에 처했다고 말하며, 그 책임은 모두 쾰른교구 대주교에게 있기 때문에 그를 파면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대주교는 개신교로 이미 넘어간 상태였습니다. 황제는 카니시오의 말을 들었습니다. 


카니시오는 신품성사를 받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훌륭한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두 번이나 참석해 가톨릭 교리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맞서 가톨릭의 교리와 체계를 재정비하는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공의회 후에 카니시오 신부는 로마로 가서 이냐시오 데 로욜라를 만났습니다. 그때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로욜라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카니시오 신부는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를 차례로 순례하며 가톨릭교회 재건 운동을 펼쳤습니다. 카니시오 신부가 가는 곳마다 가톨릭교회는 ‘기적처럼’ 다시 살아났습니다.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보았노라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이 구원되어 노래하리라”(가톨릭성가 6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