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24년 노동절 담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권위 있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고 모든 종류의 착취에서 인간을 막아 주는 것이 안식일의 역할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58항 참조).
사회에는 다양한 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법의 근본 목적은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을 수호하고,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하며, ‘공동선’을 실현하고 증진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근본 목적은 반드시 추구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국가 공동체는 “특히 노동자들과 같은 약자, 여성과 어린이들의 권리를 맨 먼저 보호”하고,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여야 할 의무를 결코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어머니요 스승」, 20항)라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누구도 인종, 국가, 성별, 출신, 문화, 계급, 성별, 종교 등의 이유로 법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니만큼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44항).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노동자에 대한 차별뿐 아니라 노동자 사이의 차별, 그리고 그 차별의 근거가 되는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먼저, 사업장 규모에 따른 차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주요 선진국에는 노동자 수를 기준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행 노동 관련법에는 절대 숫자 ‘5’가 존재합니다. 곧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보편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당 해고를 당하여도 구제 신청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최대 노동 시간 한도인 주 52시간을 넘겨 일을 하여도 법적 제재가 없을 뿐 아니라, 연장·휴일·야간 가산 수당 그리고 연차 휴가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2021년에 제정되고 최근 50명 미만 사업장에 확대 적용된 「중대 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 재해 처벌법)의 대상에서도 이들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노동자의 약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약 370만 명의 노동자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여성 노동자가 190만 명, 비정규직 노동자가 223만 명, 55세 이상의 노동자가 117만 명, 그리고 최저 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102만 명으로, 인간으로서 그리고 노동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연합뉴스, 2022년 5월 11일 참조).
국적에 따른 차별도 존재합니다. “취업과 직업은 원주민과 이주민에게 모두 한결같이 부당한 차별 없이 허용되어야”(「가톨릭 교회 교리서」, 2433항)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는 보편적 인권을 거스르는 이른바 ‘강제 노동’으로 의심될 수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 곧 이주 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어도 사용자의 동의 없이는 근로 계약을 자유롭게 해지할 수 없는 규정이 그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계약 해지와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강제 출국을 당할 위험이 있어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하여야만 합니다. 실제로 일부 사용자는 이러한 상황을 이주 노동자를 통제하는 데 악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용자와 이주 노동자 사이의 고용 관계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사업장 변경의 조건마저 ‘권역별’로 제한한 까닭에 이주 노동자는 ‘직업 선택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과 같은 인간 기본권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법적 제도적 논의와 그 적용에서도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저 임금’에 관한 논의와 결정 과정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거론하고 싶습니다. 최저 임금은 단순히 시급이나 월급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최저 임금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정책 예산뿐 아니라, 실업 급여와 산재 보상 급여, 출산 육아 급여와 기초 연금 그리고 수많은 사회 보장 제도의 책정 기준인 까닭에 사회적 약자에게 실질적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그 결정 과정이 과연 인간 존엄성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또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로 남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입니다(「노동하는 인간」, 11항 참조). 만약 노동자와 그 가족의 품위 있는 삶의 증진 그리고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소수의 이해관계와 행정적 편의성을 우선하여 결정된다면,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법은 공동선과 평화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객관적 기준입니다. 그러나 법은 그 제정과 집행 과정에서 권력에 의하여 사유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법의 제정과 적용이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의 욕망에 지배를 받을 때, 법은 더 이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망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의의 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를 경험하여 왔고 또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불의의 상황에서 우리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그들과 끊임없이 연대하여야 합니다. 나아가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불의한 법 제정과 집행을 개선하고자 노동자와 함께 노력하여야 합니다.
노동절을 맞이하여 정당한 권리 요구와 증진을 위하여 힘쓰는 모든 노동자와 연대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또한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가르쳐 주듯이,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과 약자의 권리 보호 그리고 공동선 실현을 위하여 헌신하며 법을 제정하거나 집행하는 모든 이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노동자 예수님, 그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노동자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2024년 5월 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김선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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