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노동절 담화문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
올해로 제129회를 맞이하는 노동절을 기념해서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과, 일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께서 복을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2019년은 노동 문제에 대한 국제 규범을 만들고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에 앞장서 온 국제 노동 기구(ILO)의 창설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더 큰 축하의 마음을 모든 노동자에게 전합니다. 한편, 교회는 이날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도 기억합니다. 평생 노동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하느님 구원 사업에 결정적 공로를 남기신 요셉 성인의 전구로 우리의 노동이 각자의 성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과 역대 교황님들의 가르침 안에서 노동이 가지는 중요한 가치를 기억하게 됩니다. 노동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당신께서 하시던 그 일로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흙 한 줌을 만들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모든 피조물이 인간 노동을 통하여 잘 보살펴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야기하는 인간 노동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다양함을 느끼게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도, 그 법을 시행하는 정부에서도, 또 법이 온전히 지켜졌는지를 다투는 법원에서도 최근 들어 노동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많이 들립니다. 한 사람이 노동을 했을 때, 그 품위를 지키기 위하여 받아야 하는 마지노선의 임금이 얼마인지에 대하여 여러 목소리가 들립니다. 한 사람이 노동을 하는 공간에서 지켜져야 할 안전 설비와 안전 규정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사람이 노동을 할 때, 그의 고용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지, 또 어느 정도까지만 보장해 주면 되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치열합니다. 이른바 임금, 산업 안전, 고용의 문제 등은 우리가 노동의 가치를 얼마나 잘 알고 있고, 또 현실적으로 지키려 하는지를 나타내는 법적, 제도적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의 바탕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노동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빵을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더 많은 빵을 가지고 싶고, 더 커다란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직 효율성만을 강조하고 생산성만을 중요하게 여길 때 피조물들은 상처를 입습니다. 아니 그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뿐만 아니라 그 피조물을 가꾸고 돌보아야 할 우리 인간의 가치도 무시당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사회의 노동을 생각하며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고 하신 하느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먼저 자본가들에게는 빵의 유혹이 더 큰 힘으로 등장합니다. 규정을 조금만 지키지 않으면, 또 규정을 조금만 바꿀 수 있으면 더 큰 빵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유혹에서 스스로를 지켜 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돈의 힘으로 눈앞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고, 여기서 노동 문제의 고통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본가들만이 이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인과 관료 또한 같은 유혹에 놓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빵은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고 그저 나에게 성가신 일이 생기지 않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노동 문제에 무관심해하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에게도 이 빵의 유혹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나보다 약한 다른 노동자들의 처지와 상황에 눈감고, 오직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려 할 때, 노동자들의 주장 또한 결국 빵의 유혹에 걸려 넘어간 모습으로 비추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듯 자신의 위치에 약한 고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보다 빵을 더 우선시할 수 있고, 그러한 선택을 하면서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나보다 남들이 더 큰 빵을 바란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겪는 유혹에 둔감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좋은 규정과 제도가 필요합니다. 소중한 가치를 선언하고, 약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며, 빵의 한계를 규정하는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국제 노동 기구는 지난 100년 동안 이와 같은 노동 관련 국제 규범을 만들어 왔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이러한 규정에 동참했는지, 그러했다면 잘 지키고 있는지 등도 감시해 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1991년 국제 노동 기구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제 노동 기구가 정한 핵심 협약 8가지 가운데 일부는 아직 비준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의 여러 특수한 상황과 기존의 법과 충돌하는 부분을 해결하느라 늦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보편적 노동권 존중에 더 이상 늦어지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약한 이들의 노동 문제인 바로 청소년 노동 문제입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에 비하여 이번 담화문에서 자세히 소개할 지면을 내지 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사회 안에서 청소년들이 임금, 고용, 안전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늘어나지만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약자일 수밖에 없기에 이들의 고통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현장 실습 제도 개선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사회가 더욱 큰 관심으로 청소년 노동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할 것을 촉구합니다.
노동절을 맞아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많은 이들을 다시 한번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아픔이 하루 빨리 해결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사명을 기억하기를 기도합니다. 노동계와 재계, 그리고 정부 안에서 노동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많이 이루어지며, 다양한 자리에서 노동을 주제로 한 대화가 더 많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시대의 고민에 함께하며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옷깃을 여미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노동자의 주보이신 요셉 성인의 전구로 더욱더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봅니다.
2019년 5월 1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배기현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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